올해 본예산이 확정된 지 한달 만에 또 다시 정치권을 중심으로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1분기 추경 편성은 2020년부터 내리 3년째 이어졌다. 코로나19를 지나며 ‘습관적’ 조기 추경 편성 관행이 더 심해졌다. 추경 편성이 정치권의 정쟁 도구화가 되고 있는지 돌아보고, 추경 편성 요건을 더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난방비 폭탄에 불거진 조기 추경론
추경 주장이 불붙게 된 계기는 최근 ‘난방비 폭탄’ 논란 때문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서민 지원과 소비 진작을 위한 30조원 규모의 민생 추경 편성이 필요하다 주장하고 있다. 국민의힘 당권주자인 조경태 의원도 긴급 난방비 지원 추경을 편성하라고 나섰다.
추경이 본래 기능을 상실했다는 비판은 어제오늘 나온 것은 아니다. 국가재정법은 추경 편성 요건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이미 추경은 보수·진보 정권 관계 없이 거의 매년 편성될 정도로 상시화됐다. 문제는 어떤 문제든지 재정으로 해결하려는 ‘추경 중독증’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정치권의 추경 편성 주장에 거듭 선을 긋고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6일 기자간담회에서 “640조원 규모 예산을 통과시킨 게 엊그제고 이제 막 집행을 시작하고 있는데 추경을 하는 건 재정 운용의 ‘ABC’에도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4년째 내리 ‘1분기 추경’ 주장
국민일보가 29일 1997년 12월 외환위기 이후 편성된 추경을 전수 분석한 결과, 1998년부터 지난해까지 추경은 총 29차례 편성됐다. 지난해까지 추경을 편성하지 않았던 건 다섯해(2007·2010·2011·2012·2014년)뿐이었다.
그동안 추경이 적재적소에 쓰여 경기를 뒷받침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1분기 편성’이나 ‘30조원 이상’ 등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형태의 추경이 습관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1분기에 추경이 국회를 통과한건 1998년 1차(3월 25일), 2020년 1차(3월 17일), 2021년 1차(3월 25일), 2022년 1차(2월 21일) 4차례뿐이었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을 제외하고 2020년부터 1분기 추경은 코로나19 극복을 명목으로 3년 내리 편성됐다. 특히 지난해 1차 추경은 정부가 1월에 편성해 국회에 제출했는데, 이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이후 71년 만에 처음있는 일이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상반기 추경 편성도 드물었다. 98년 이후 추경 중 상반기 국회를 통과한 건 10차례(34.5%)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상반기에는 예상치 못한 사태가 터지더라도 본예산으로 마련해 둔 예비비 등을 우선 활용했다.
이에 비해 최근에는 수십조원 단위의 대규모 추경이 상시화되는 추세다. 98년 이후 추경 중 10조원 이상 규모는 14차례(48.3%) 였는데, 이중 2020년 이후 편성된 게 7차례였다. 특히나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30조원 이상 대규모 추경이 3년 내리 편성됐다.
특히 지난 3년간 이뤄진 1분기 추경은 선거 직전에 편성됐다. 추경이 선거를 거냥한 선심성 퍼주기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2020년과 2021년 1분기 추경은 각각 21대 총선(2020년 4월 15일)과 재보궐선거(2021년 4월 7일)를 2주에서 한 달가량 앞두고 이뤄졌다. 지난해 1분기 추경도 대선을 20여일 앞두고 통과됐다.
추경 중독증세는 문재인정부 들어서 더욱 심해졌다는 평가다. 문 정부에서 추경은 총 10차례 편성됐고, 총 규모는 151조3000억원에 달했다. 노무현정부의 5회(17조1000억원)과 이명박정부의 2회(33조원) 및 박근혜정부의 3회(39조9000억원)을 모두 합친 것보다 60조원 이상 많다. 물론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이 있긴 했지만, 이를 감안해도 과도하다는 지적이 우세하다.
추경이 정쟁 도구 사용 안 되려면
정치권이 추경 카드를 수시로 꺼내드는 상황에서 추경 편성 요건을 더 엄격히 제한하거나 현재 제시된 요건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현재 추경 요건은 2007년 국가재정법 제정 당시 정해졌다. 그전까지 추경 편성은 ‘예산 성립 후 생긴 사유로 인해 예산 변경 필요시’로 포괄적으로 명시돼 있어서 사실상 추경 편성에 대한 제약이 없었지만, 당시 재정건전성을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는 지적에 따라 새롭게 정해졌다.
한국세무학회장을 지낸 박종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세계잉여금 등을 국채 상환에 쓰지 않고 추경 재원으로 쓰거나, 본예산 심사 시 누락됐던 예산을 추경에 되살리기도 한다”며 “국가재정법의 애매한 추경 편성 요건을 좀 더 구체화하고 정부의 법 규정 위반 시 제재를 보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대로 추경 편성 요건을 더 완화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 해외 선진국들은 추경 편성에서 행정부의 광범위한 재량권을 인정하고 있다. 미국 예산회계법은 ‘제정된 법률에 의해 또는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일본 재정법은 ‘긴요한 경비 지출 또는 채무 부담이 필요한 경우’를 편성 요건으로 두고 있다. 한 전문가는 “추경 요건을 정비하는 것도 의미있을 수 있지만, 현 상황에서 더 중요한 것은 결국 요건을 해석하는 ‘사람’의 판단 문제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세종=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