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거나 경찰 수사선상에 오른 ‘악성 임대인’(법인 3곳 포함) 16명이 비슷한 시기 피해가 집중됐던 서울 서남부권 신축 빌라를 조직적으로 사들인 정황이 포착됐다. ‘빌라왕’들이 신축 빌라를 중심으로 특정 세력과 연결된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이다.
국민일보가 24일 서울 서남부권 소재 신축빌라 28곳의 등기부등본 657건을 분석한 결과 같은 빌라에서 악성 임대인들의 매매 이력이 무더기로 확인됐다. 분석 대상으로 삼은 신축빌라 28곳은 전세사기 사건 공소장에 언급되는 등 피해가 집중된 곳이다. 주로 서울 강서구 화곡동, 양천구 신월동, 관악구 신림동 등에 있다.
2018년 1월 입주를 시작한 화곡동 A빌라의 경우 전체 28가구 가운데 무려 23가구가 빌라왕들 소유였다. 세 모녀 전세 사기 사건 주범인 김모(58)씨의 두 딸이 6가구를 매입했고, 나머지 17가구는 진모(51)씨와 이모(66)씨가 소유주로 이름을 올렸다. 진씨와 이씨는 2019년 기준 등록 임대주택이 각각 594채와 490채로 전국 1위와 4위를 기록했던 이들이다. 현재 이들 4명의 매물은 모두 세무당국에 압류됐거나 법원으로부터 강제경매 개시 결정이 내려진 상태다.
신월동 소재 B빌라도 빌라왕들의 먹잇감이었다. 전체 3개동 72가구 중 53가구의 등기부등본에서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보증금 미반환 사고로 경찰에 수사 의뢰한 이들 이름이 발견됐다. 세 모녀 중 두 딸이 35가구를 사들였고, 이씨가 18가구를 사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빌라의 분양대행을 맡았던 업체는 세 모녀 사건의 공범으로 함께 기소됐다. 분양업체 관계자들은 재판에서 이씨와 다른 빌라 분양 거래도 여러 건 체결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인근 부동산에서 이씨 등 임대인들을 소개 받았고, 전세 사고가 날 줄은 몰랐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세 모녀 사건이 알려지기 전부터 이미 보증금 미반환 행각으로 악명이 높던 ‘원조 빌라왕’들은 화곡동 C빌라 등기부등본에서 무더기로 발견됐다. 전체 18가구인 C빌라의 13가구는 김모(44)씨와 강모(56)씨가 사들였다. 김씨는 2019년 보유하던 임대 주택 수가 584채에 달해 전국 2위를 기록했다. 현재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에서 전세사기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화곡동 일대에 283채를 보유했지만,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했던 강씨는 지난 1월 사기 혐의로 이미 재판에 넘겨진 신세다. 화곡동 D빌라 역시 수사 대상인 빌라왕 5명이 사들였다.
전국 3400여채를 소유해 ‘빌라의 신’으로도 불리는 일당 중 한 명인 최모(42)씨도 2015년과 2017년 신정동과 신림동 등지의 빌라 매입 사실이 확인됐다. 한 피해자는 “입주 당시에 ‘빌라 팔아드립니다’라고 적힌 전단지가 동네에 많이 붙어 있었다”며 “건축주들도 가담한 조직적인 사기 범행”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수사기관은 빌라왕들이 비슷한 지역에서 동시에 신축 빌라를 사들인 점을 주목하고 있다. 건축주와 공모한 공인중개사와 분양대행업체, 악성 임대인들이 임차인들에게 전세가를 부풀려 받은 뒤 이를 리베이트 형태로 분배하며 갭투자를 진행한 것으로 의심한다. 전세사기 전담 수사본부 관계자는 “배후 세력을 추적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판 김용현 성윤수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