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그를 존폐 위기에 있던 유한킴벌리를 대학생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은 기업,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바꿔놓은 스타 기업인으로 기억할 것이다. 누군가는 그를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기존 정치권의 대안으로 돌풍을 일으켰던 주인공으로 떠올릴 것이다. 문국현 뉴패러다임 인스티튜트 대표 이야기다.
‘문국현 대표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던데.’ 전해 들은 소식에 궁금증이 일었다. 정치권을 떠난 후 경영에 복귀해 9년 동안 이끈 국내 3대 의류 수출 기업 한솔섬유의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난 게 지난해 3월의 일이다. 그 후 그는 미국 UC버클리와 손잡고 대학생 창업 경진대회를 준비하고, 섬유산업의 디지털화를 위해 정부가 추진하는 패션테크 클러스터 사업기획단 공동단장을 맡았으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국민 온실가스 감축운동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아얀테첨단소재라는 회사를 설립해 경영자로서 세 번째 출발선상에 섰다. 1949년생, 이제 7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도 그는 인터뷰 내내 한국의 재도약과 혁신, 도전을 강조하며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기보다 기회를 말했다.
-IMF 외환위기 때 직원 해고 없이 유한킴벌리를 성장시키면서 말 그대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한솔섬유에서 맞은 팬데믹은 어땠나.
“한솔섬유의 제일 큰 기지가 베트남이다. 셧다운으로 고생했지만 역설적으로 입지가 강화됐다. 3D 디자인 등 기술 혁신에 몰입해왔는데 코로나19가 디지털 대전환을 가속화했기 때문이다. 미국 유럽 전문가들과 디자인을 공조할 때 직접 샘플을 주고받기 어려워지면서 디지털 트윈(현실 세계의 기계 장비 사물을 가상세계에 구현한 것)으로 대체했다. 3~4개월 걸리던 과정을 일주일 만에 해결할 수 있게 됐다. 코로나와의 전쟁이 프로세스가 디지털로 바뀌는 전쟁이자 기회였다.”
-올해 경제 상황이 지난해보다 더 힘들 것이라는 데 전문가들의 이견이 없는 듯하다. 어떻게 전망하나.
“중국 중심의 공급망에 의존하는 시대가 끝났다는 건 컨센서스가 됐다. 중국이 수출하던 4조 달러의 절반이 누군가 대신 수출해줘야 할 공업 제품이다. 세계 5대 제조업 국가에서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독일 일본 한국 중에 독일은 에너지 문제를 비롯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발목이 잡혀있다. 일본은 일부 기업이 디지털 전환에 앞서 있지만 전반적인 민도는 우리에게 뒤처진다. 제2의 글로벌 공급망 구축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우리가 새 국제 공급망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중국 수출 절반의 절반만 가져와도 1조 달러 가까운 기회가 생기는 것 아닌가.”
-공격적으로 위기를 돌파하자는 말씀인가.
“위기가 100이라면 기회는 500인데, 100이 무서워 보이는 것뿐이다. 당장은 꽤 많은 회의론이 있겠지만 더 크게 더 넓게 보면 기회가 있다. 앞으로 2040년까지가 스마트 제조강국이자 제2의 글로벌 공급망 핵심국가로 도약할 중요한 기회라고 본다. 전 세계가 미증유의 복합위기에 빠져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상대적 우위를 5개나 가지고 있다. 위험만 보지 말고 위험을 극복한 뒤에 쏟아질 30년간의 먹거리를 생각해야 한다.”
-5대 우위라면 국제 공급망 재편의 기회 외에 나머지는 무엇인가.
“미국과 유럽, 사우디가 제조업과 인프라, 국방 재건에 나서고 있다. 건설과 제조업 기술, 인력의 노하우가 모두 필요한데 한국만큼 잘 해낼 수 있는 나라가 많지 않다. 둘째, 신재생에너지와 함께 원자력이 다시 각광받고 있다. 원전 건설과 운영 측면에서 우리만큼 종합적인 능력을 갖춘 나라가 또 없지 않나. 또 디지털 경제 전환에서 오는 기회가 있다. 한국은 광케이블을 제일 먼저 깔았던 통신 기반이 있고 5G를 넘어 6G를 논의하는 유일한 나라다. 넷째, 홍콩이 아시아 허브의 위치를 내놓아야 하는 상황인데 싱가포르 혼자 물려받을 수는 없다. 이런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그 기회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내전처럼 갈라져 싸우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내전을 멈춰야 창밖에 온 미래와 기회가 보인다. 독일이 오늘날 유럽의 중추 국가가 된 배경에는 기민당과 사민당의 합작, 즉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통독 이후의 경기 침체와 양극화를 이겨내기 위해 서로 공감하는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다. 우리도 방향만 잘 설정하면 된다. 경기장이 집 안이면 이전투구가 되지만 집 바깥이면 축구가 되고 야구가 된다. 그렇게 바꾸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코로나19로 일반화된 재택근무를 98년 유한킴벌리가 국내 최초로 도입했다. 대표님의 대선 공약이었던 중소기업부 신설, 고향세 도입 등도 뒤늦게 현실화됐다. 시대를 앞서가는 시야를 갖는 통찰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기업하는 사람은 80억 인구가 고객이고 월드 베스트가 경쟁자다. 이만큼 금광을 팠으니 됐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고, 아직 더 배우고 공부할 게 있다고 생각하면 무수히 널려 있는 금광이 보인다. 저는 언제 어디서나 보이는 게 우리 사회,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혁신의 기회이고 재창조의 기회다. 고객과 직원, 우리 국민, 세계 시민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킬 때의 희열이 있다. 그게 제 행복의 원천이다.”
-우리는 왜 스타 기업인이나 존경받는 경영인이 드물까.
“한국 현대 기업의 역사는 70~80년에 불과하다. 서구의 200년에 비하면 아주 짧다. 그러다 보니 정부 주도형 국가 전략 기반 산업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비판받을 일이 많았다. 창업 경제, 서비스 경제, 기술 경제로 갈수록 유니콘 기업이 대거 탄생할 것이다. 관점과 방법을 바꾸면 10~15년 안에 1000개도 가능하다는 게 실리콘밸리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렇게 탄생할 유니콘에서 세계 시장으로 나가 존경받는 기업인들이 쏟아져 나오리라 생각한다.”
-추진하는 새 프로젝트 중에 가장 관심이 가는 건 UC버클리와 협력하는 한국혁신센터 설치와 창업 경진대회다.
“오는 5월 2일에는 스타트업들이, 3일에는 국내 우수 대학생들이 실리콘밸리 비즈니스 포럼 관계자들 앞에서 각각 사업계획 제안 경연대회를 하게 된다. 그 관문을 통과하면 국내에서 1년간 스타트업 캠프 과정에 들어가고, 그중 선별된 이들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글로벌 창업 연수 과정을 밟게 된다. 한국은 2021년 글로벌 스타트업 생태계 지수에서 세계 19위였지만 1위 미국과 점수 차이가 너무 커 사실상 랭킹이 의미가 없다. 젊은이들의 기백만으로는 유니콘(시장 가치 10억 달러가 넘는 기업)이 탄생하기 어렵다. 우리보다 15~20배 큰 북미 시장으로 직접 진출하는 징검다리를 놓으려 한다. 한국혁신센터는 발탁된 학생들과 기업의 현지 활동을 돕는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된다.”
-“정치는 잊은 지 오래”라고 했지만 미련이나 후회는 없나.
“우리나라를 더 잘 만들어보고 싶은 꿈을 수백만명과 나눴고 압도적 지지를 보내준 은평에서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후회는 없다. 다만 국회를 떠나고 나서 창조한국당이 정부로부터 1억원 손해배상 판결을 받아내고 당시 검찰이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것까지 입증하는 데 2년이 걸렸다. 은평 시민들의 압도적 지지와 정당투표 65만표를 끝까지 지키고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 간절한 소망을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참으로 아쉬웠다. 국민들께 갚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젊은 세대에게 메시지를 주신다면.
“전 세계적인 절체절명의 복합위기 시대에 우리 대한민국이 주축 국가가 될 기회를 잡으려면 젊은이들의 글로벌 메가트렌드 파악 능력이 필수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국내외에서 창업하기 쉬워졌고 이동하기 좋아졌다. 앞으로는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다. 용기를 갖고 이 시대 대한민국을 더욱 사랑하고 세계적 과제에 도전하며 헌신해 더 큰 보람을 느껴보라고 말하고 싶다.”
■문국현은 누구…
1974년 유한킴벌리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95년부터 13년간 대표이사를 지냈다. 경영을 맡은 후 매출 3.4배, 순이익은 9.3배 성장하는 성과를 올렸다. 2003년부터 미국 킴벌리클라크의 북아시아 총괄 사장 겸 이사회 의장도 함께 맡았다. ESG(친환경·책임·투명경영)를 국내에 알린 선구자로 유한킴벌리의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이 그의 아이디어다. 2007년 창조한국당 후보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137만표(5.8%)를 얻었다. 이듬해 총선에 출마해 서울 은평을에서 당선됐다. 이후 당이 발행한 당채 이자율 특혜 시비에 휘말려 의원직을 잃었다. 2010년 뉴패러다임 인스티튜트를 세워 한·중·미 등에서 사회책임 평생학습 기반 혁신과 창조경제 운동을 펴고 있다. 현재 실리콘밸리 비즈니스포럼 공동회장, 국제전기자동차엑스포 공동조직위원장, 한국드러커소사이티 명예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