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친필 사인이 담긴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를 읽으며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몇 번 열음 씨를 만난 느낌은 꾸밈없이 소박하고 부끄러움 많은 평범한 소녀 같았습니다. 허나 책을 읽으며 그녀가 타고난 이야기꾼임을 금방 알아챘습니다. 그 이야기를 음악 속에 재미있게 녹여낼 수 있는 내공이 있기에 사람들이 감동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을 연주한 느낌을 열음 씨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딱 그 느낌이었다. 몸이 머리와 마음하곤 상관없이 반응하는 기분, 심장은 열려버린 듯, 머리는 비어버린 듯, 슬픈 건지는 모르겠는데 언제부턴가 눈물도 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내 허락은 전혀 필요 없는 듯 어느새 나에게로 성큼 다가와 있는 음악. 그래서 다른 건 모르겠고, 그저 내 이야기 같은 음악.”
이 음악처럼 열음 씨가 ‘내 이야기 같은 음악’을 연주하기에 만인이 열광하는 게 아닐까요. 실제로 열음 씨의 연주를 들으면 어떤 음악이든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그 음 하나하나가 살아나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책을 읽으며 열음 씨가 연주하는 여러 작곡가의 음악을 유튜브로 찾아 꼼꼼히 들었습니다. 아르보 패르트의 ‘아리누시카의 회복을 위한 변주곡’은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잎들을 다 버린 겨울나무처럼 쓸쓸함과 고요함이 깃들인 침묵의 소리가 가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어쩌면 열음 씨의 내면과 닮은 소박함과 단순함이 뚝뚝 떨어지는 한 음 한 음이 마중물이 되어 우리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우물을 길어 올리는 듯했습니다. 거기에 평온함이 있었습니다. 열음 씨가 편애한다는 슈만의 ‘환상곡’과 ‘크라이슬레리아나’는 꿈꾸듯 속삭이는 영혼의 대화 같습니다. 이야기하듯 펼쳐지는 정감 어린 슈만의 음악을 열음 씨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런 느낌을 열거하는 이유는 열음 씨 연주 밑바닥에 있는 ‘이야기의 힘’ 때문입니다. 나는 이야기의 힘을 굳게 신뢰합니다. 이야기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건 아니지만 그 이야기가 진실하고 간절하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눌 수 있다면 거기에 구원의 문이 열린다고 믿습니다.
엘리 비젤은 ‘숲으로 난 문들’에서 “신은 이야기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인간을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작가 카렌 블릭센은 “어떠한 슬픔도 그대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 이야기를 남과 나누면 이겨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야기를 좋아하셔서 인간을 만드시고 사람과 이야기하길 원하시고, 서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는 사랑과 평화의 이야기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