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병역면탈 계약서에 ‘뇌전증 2000만원’… ‘환불불가’ 족쇄 채워

입력 2023-01-06 04:07
이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뉴시스

허위진단으로 ‘병역면탈’을 조언한 브로커들이 구체적으로 ‘뇌전증 5급(면제) 진단’ 등의 수법을 계약서에 명시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또 계약서에 ‘환불 불가’ 등 독소 조항을 넣어 상담을 받은 의뢰인들이 실제 병역을 기피하도록 유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일보는 5일 병역비리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브로커 구모(47·구속)씨와 불구속 수사 중인 김모(37)씨가 실제 상담에서 작성했던 ‘병역면탈 계약서’를 입수했다. 김씨는 구씨 아래에서 ‘부대표’를 맡으며 일을 배워온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김씨가 2021년 상담을 마치고 실제 작성한 계약서에는 ‘업무’ 항목에 수기로 ‘뇌전증 5급’이라고 적혀 있다. 뇌전증 진단을 통해 신체검사에서 ‘5급(전시근로역)’을 받게 해주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상담료는 2000만원으로, 사실상 착수금과 같은 개념이었다.


A4용지 1장짜리 계약서 상단에는 ‘계약자 갑이 항경련제 투약 시 보수 전액을 계약자 을에게 지급한다’고 적혀 있다. 계약서상 ‘갑’은 의뢰인, ‘을’은 브로커 행정사다. 또 ‘계약자 갑이 병원 미진료, 미투약 등의 사유로 5급/전시근로역 미판정 시 계약자 을은 지급받은 보수를 환불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허위로 뇌전증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알려줬는데도 의뢰인이 병원에 가서 그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계약금 전액을 받겠다는 뜻이다.

계약서 조항 가운데는 병역면탈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돈을 전액 지급해야 한다는 조항도 있다. 액수는 직접 수기로 적었다. 의뢰인의 상황과 상담 내용에 따라 금액을 다르게 제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계약서 마지막 부분에는 ‘갑이 단순 심리 변화 등을 이유로 환불을 요구할 수 없다’는 조항도 있다. 브로커는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데 이때 민형사상 책임을 포함한 일체의 이의제기를 할 수 없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어떤 경우에도 계약 해지 권한은 브로커에게만 있을 뿐 의뢰인은 돈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핵심 브로커 구씨가 2019년 작성한 계약서도 비슷한 양식이다. 당시 계약서상 구체적인 업무는 ‘재검(병역처분 변경)’이라고 적혀 있다. 공익 판정을 받은 의뢰인에게 “군 면제도 가능하다”며 계약서 작성을 유도했다고 한다. 당시 이 계약서의 보수는 800만원이었다. 이 계약서에도 ‘환불 불가’ 조항이 담겨 있다.

구씨와 김씨 두 사람의 계약서에는 공통으로 ‘국군 국방행정사’라는 표현이 들어간다. 또 ‘국군 국방행정관 인’이라고 적힌 직인도 찍혀 있다. 이들의 계약서를 분석한 한 변호사는 “위법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진료 여부와 무관하게 전액 지급을 요구하거나 환불 불가 등 의뢰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내용이 담겨 있다”며 “의뢰인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국방행정관’ 등의 직함을 자의적으로 만들어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판 정신영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