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일이 있어 2박3일 여수에 머물렀다. 전남은 원래 눈비가 잘 오지 않는 지역이라고 했는데 둘째 날부터 눈이 내리더니 마지막 날이 되자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눈보라가 쳤다. 호텔에서부터 택시가 잡히지 않아 예매해둔 KTX를 놓치고, 다음 차는 매진이고, 어쩔 수 없이 그다음 차인 무궁화호를 탔다. 무궁화호는 제일 마지막까지 매진되지 않은 기차였다. 서울까지는 다섯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일 년에 몇 번씩 국내 여행을 하면서도 무궁화호를 탄 것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의 일이다. 조용하고 넓은 좌석과 큰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낯설고 반가웠다. 열차는 천천히 순천역과 남원역을 지나갔다. 눈 내리는 풍경이 창밖을 새하얗게 채우고 있었다. 흰 눈이 두껍게 쌓인 침엽수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늘어지고, 앙상한 가지들은 눈밭의 무늬가 되어갔다. 나의 머릿속에도 겨울 풍경이 침입한 것처럼 창밖을 보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기차는 몰아치는 눈보라 속을 느리게 달렸다. 그 안에서는 한참 동안 창밖을 구경할 수 있었다. 무궁화호가 지나오는 역들은 대체로 조용하고 사람이 없었다. KTX를 탔을 때 좁은 좌석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긴장과 부산스러움 역시 무궁화호에는 없었다. 콘센트를 찾거나 화장실에 가기 위해 객실을 걸으면서 마주친 승객의 대부분은 노인과 청년들이었다. 금요일 오전임에도 한 객실에 몇 사람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모두 나처럼 창밖 풍경을 바라보거나 잠들어 있었다. 이 공간의 시간은 다른 곳보다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KTX에서 견뎌야 하는 것이었던 이동의 과정은 무궁화호에서 여행의 시간으로 변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편리함과 대체되어 온 것들을 생각하자 조금 시무룩해졌다. 무궁화호가 영원히 사라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날 후회하지 않도록 앞으로는 여행마다 무궁화호를 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용산역에 도착했다.
김선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