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과 관련한 첩보보고서 등을 삭제하라고 시킨 혐의를 받는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14일 검찰에 출석해 12시간30분간 조사를 받고 귀가했다. 박 전 원장은 조사에 앞서서는 고(故) 이대준씨 피살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이나 서훈(구속 기소)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부터 관련 첩보 삭제 지시를 받지 않았으며, 자신도 삭제를 지시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조사를 마치고 귀가할 때에는 “삭제 지시를 몰랐다는 것을 주장해 기록으로 남겼다”고 다소 입장 변화를 보였다.
그의 미묘한 입장 변화의 이유는 “오늘 수사 과정에서 중대한 사항을 알았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국정원 내부에서 삭제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의미였다. 박 전 원장은 “(그동안) ‘삭제가 원천적으로 국정원에는 존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삭제 지시를 했다는 내용과 삭제한 문건도 메인서버에 남기 때문’이라고 했었는데, 오늘 검사가 수사를 할 때 (들어) 보니 삭제가 되더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부장검사 이희동)는 박 전 원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박 전 원장은 서해 사건 당시 자신의 측근인 노모 전 국정원장 비서실장을 시켜 이씨 피살 관련 첩보보고서 등을 무단 삭제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이씨 사망 사실이 파악된 직후 열린 긴급 관계장관회의에서 서 전 실장의 주도로 사건 은폐 및 이씨의 월북 가능성이 논의됐고, 해당 회의 직후 자료 삭제 행위가 이뤄진 것으로 본다. 이 회의 이후 국방부와 국정원에서 각각 60건, 46건의 자료가 사라졌다는 게 감사원 조사 결과였다.
박 전 원장은 오전 10시 검찰에 출석하면서 취재진에게 “저는 국정원을 개혁하러 갔지, 삭제하러 가지 않았다”고 말하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었다. 이런 그는 조서 열람을 마치고 오후 10시30분쯤 청사를 빠져나올 때엔 “삭제라는 용어가 국정원에는 존재하지 못한다고 늘 얘기했는데, 오늘 (검찰에서) 들어 보니까 삭제가 가능하더라”고 했다. 그는 실제로 삭제된 파일이나 문건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검찰이 어떤 결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답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새벽 3시에 비서실장에게 삭제를 지시했다는 구체적 정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했느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박 전 원장은 조사 과정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과 관련한 문답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검찰은 지난 13일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도 소환해 조사했다. 지난 9일 서 전 실장 등 기소 때는 첩보 삭제 지시 혐의가 공소사실에서 빠졌었는데, 이 혐의에 대해선 보강 수사 뒤 박 전 원장, 서욱 전 국방부 장관 등과 함께 재판에 넘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씨의 유족은 이날 서울중앙지검에 직무유기와 허위공문서작성 등의 혐의로 문 전 대통령을 고소했다. 유족은 문 전 대통령이 이씨가 북한 해역에 있다는 점을 알고도 구조 조치를 이행하지 않았고, 이씨에 대해 월북 의도가 있었다고 단정해 발표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구정하 조민아 기자 g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