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관치금융의 빛과 그림자

입력 2022-12-15 04:03

레고랜드와 흥국생명 사태는 시장의 실패였다. 강원도와 흥국생명의 안일한 판단에 채권시장은 경색됐고, 산업계 곳곳에서 유동성 위기가 감지됐다. 금융 당국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50조원+α’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했고, 태광그룹 오너 일가 쪽을 접촉해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불이행 입장을 번복하게 만들었다. 기획재정부 등 정부 부처와 금융감독 당국이 긴밀하게 협조하며 불협화음 없이 시장의 공포를 잠재웠다. 정부 모 고위 관계자의 소신처럼 위기에는 관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대한민국 금융은 대표적인 관치 산업이다. 법보다는 금융 당국의 스탠스에 따라 대출 한도와 금리가 좌지우지된다. 금융 당국 수장의 말 한마디가 핀테크업체를 혁신의 아이콘으로 만들 수 있고, 혹은 죽일 수도 있다. 론스타를 열외로 하면 씨티은행이나 스탠다드차타드 등 세계 굴지의 금융회사들이 대한민국 특유의 관치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전하는 게 우리 금융시장이다.

그러나 관치는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데 만족하지 못한다. 그동안 정치적 이유나 비경제적 논리에 따른 관치가 횡행했다. 대표적인 것이 인사 개입이다. 이명박정부 시절에는 고려대-소망교회 인맥이 4대 금융지주 회장을 휩쓸며 ‘4대 천왕’으로 불렸다. 박근혜정부 때는 서강대 출신 금융인 모임인 ‘서금회’가 금융권을 쥐락펴락했다. 그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올 때마다 정부는 전문성과 도덕성을 갖춘 최적의 인물이라고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정권과 연이 닿아 있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안타깝게도 화려한 경력의 낙하산들이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의 한국 금융회사를 세계적인 투자은행(IB)으로 발돋움시켰다는 얘기는 들어본 바 없다. 그들에게 ‘자리’는 전리품이었고, 본업인 정치권이나 고위 관료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일 뿐이었다.

그들을 모셨던 이들은 ‘안 좋은 추억’을 하나씩 갖고 있다. 관료 출신 모 지주 회장은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 의전을 요구했다. 첫 출근길 회사 정문 앞에서 기다리던 관계자들에게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가 생각하는 도어 투 도어 의전은 자신의 아파트 현관 앞에서부터였던 것이다. 모 회장은 임원들에게 공개 석상에서 “사무관보다 못하다”고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낙하산 금융권 수장 중 도덕성과 전문성 차원에서 우등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게 금융권의 공통된 인식이다.

시장 자율을 외친 윤석열정부도 모양새를 보니 지난 정부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노골적 개입이 아닌 ‘문제가 있는 이들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는 방법의 차이뿐이다. 지분이 없는 금융지주 회장들이 재벌 오너들처럼 1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면 안 된다는 나름의 원칙도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금융회사들은 현 정부 입맛에 맞는 인사를 추천하는 ‘알아서 기는’ 행태가 연출되고 있다.

이런 비판이 제기되면 금융 당국은 손사래를 친다. 누구를 앉히라고 압력을 넣지도 않았고, 출신지나 정치적 성향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신한과 농협금융지주 회장 교체 사례를 보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금융권 낙하산 논란이 커지면서 현 정부의 공약집을 살펴봤다. 공공기관 낙하산 근절은 있었지만 금융기관의 그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가스공사 사장에 관련 경력이 전무한 정치인 출신 최연혜 전 의원이 임명된 것을 보면 공약도 무용지물이 된 듯싶다. 현 정부를 탄생시킨 것은 조국 사태에 따른 ‘내로남불’에 진저리를 친 국민의 선택이었다. 지금부터라도 관치금융이 과거의 그림자를 벗고 시장을 건전하게 이끄는 긍정적인 역할만 해줬으면 한다.

이성규 경제부장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