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화물연대의 업무 복귀 결정으로 민주노총이 오랫동안 준비했던 ‘총파업 총력 투쟁’은 리더십의 한계만 드러낸 채 끝이 났다. 선봉에 섰던 화물연대는 상처투성이가 됐고 이봉주 위원장은 정부의 안전운임제 3년 연장 약속이라도 지키라며 노숙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민주노총의 실패는 무엇보다 정부 대응이 어느 때보다 정교하고 완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법과 원칙, 노사 법치주의를 내세우는 윤석열 대통령의 강경한 태도가 주효했다고 할 수 있다. 선진국이라면 최소한 법과 제도, 규범에 기초한 노사관계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법치는 노사관계 시스템의 기본값에 불과하다. 법치의 토대 위에 대화와 타협, 상대방에 대한 공감과 배려라는 선의를 쌓아올리지 않는다면 그 노사관계는 시스템 오류에 빠지고 말 것이다. 노사의 이해충돌은 시대와 이슈를 달리하며 지속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매년 반복되는 노사 협상에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란 있을 수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반복 게임에서 최선은 완승이 아니라 상생(win-win)의 길을 찾는 것이다. 화물연대의 파업 또는 집단운송거부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이유는 그들이 특별히 과격해서가 아니라 화물운송 시스템이 왜곡돼 있기 때문이다.
안전운임제 3년 연장으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는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의 진단은 정확하다. 그러나 화물연대가 궁지에 몰린 틈을 타 3년 연장 약속은 물론이고 안전운임제 자체를 폐기하려는 것은 꼬인 실타래를 더욱 꼬이게 할 뿐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13일 국무회의에서 불법과는 타협이 없다며 화물연대의 불법행위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런 원칙을 관철하기 위해서라도 정부는 대화 약속을 믿고 파업을 스스로 접은 화물연대와 하루빨리 대화와 타협에 나서야 한다. 반복 게임에서 배신은 보복을 불러올 뿐이다.
정부가 사회적 대화와 타협을 모색해야 할 또 하나의 이슈가 고용노동부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노동 유연화 개혁안이다. 이정식 장관은 이를 바탕으로 빠른 시일 내 입법안을 마련해 신속하게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연구회의 권고안은 근로생활의 가장 중요한 임금과 근로시간 결정 체계를 크게 흔드는 것이라서 충분한 공론화와 폭넓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입법 절차에 들어가야 한다. 노동계 반발은 차치하고라도 주52시간을 정착시켜 30, 40대 직장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 냈던 더불어민주당은 사회적 대화와 타협의 절차조차 생략한 정부의 입법안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정부 개혁안은 다음 총선을 겨냥한 정쟁의 불쏘시개로 활용될 위험도 있다.
임금과 근로시간 제도의 유연화는 가야 할 방향이고 연구회가 열거한 여러 개혁 메뉴들은 우리 사회에서 꼭 논의해봐야 할 이슈들이다. 점차 빨라지는 디지털 전환과 플랫폼 노동의 증가 추세를 보거나 노동시장의 주력군으로 부상하는 20, 30대 청년층의 변화하는 가치관을 고려할 때 그리고 30, 40대 여성의 경력단절을 줄이기 위해서도 산업화 시대의 임금과 근로시간 제도를 크게 한 번 손질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시장 구조개혁이라는 큰 그림도 없이 유연화 메뉴를 한꺼번에 다 쏟아낸다면 노사관계는 합리적인 대화와 타협보다 세 대결 양상으로 번져 시스템 마비로 갈 수 있다.
윤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노동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법치에 기초한 노사관계와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화물연대 파업을 계기로 노사관계 바로잡기의 방향이 정해졌다면 남은 과제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의 비전과 밑그림을 제시하는 것이다. 연구회의 권고안은 이를 위한 좋은 출발점이지만 한계도 명확하다. 각종 노동시장 격차를 줄이고 노동 약자의 역량을 높이기 위한 정부의 역할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양대 노총이 연구회의 의견 수렴 절차를 조직적으로 보이콧했다는 점도 정부에 큰 부담이다.
권고안을 포함해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혁 방안을 모두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대화 테이블에 올려놓고 사회 각층의 의견을 경청하는 프로세스를 밟는다면 여러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그런 다음 경사노위 차원의 집중 협의를 통해 개혁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최대 공약수를 도출해 입법 절차에 들어가는 것이 순리다.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