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메이저가 될 때까지

입력 2022-12-14 04:03

평생을 살아오면서 나 스스로 잘했다고 이야기하는 것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시인으로 산 것. 둘째는 초등학교 선생으로 일관한 것. 셋째는 시골에서 버티며 산 것. 넷째는 자동차 없이 견딘 것. 하지만 그 네 가지는 다른 사람들이 선호하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다. 비록 그것이 그렇다 해도 나는 그 네 가지를 내가 잘한 일이 될 때까지 그 일들을 버리지 않고 살고 싶었다.

시인은 다른 영역의 예술가에 비해 지극히 영세한 분야의 사람들이다. 오죽하면 세상의 직업 가운데서 수녀와 시인을 가장 낮은 보수를 받는 사람들로 분류했을까. 원고료 수준도 그러하지만 가령, 소설가들이 문학 전집 같은 책을 낼 때 삼백 페이지 정도 책 한 권을 배당받는데 시인인 나는 겨우 한 페이지나 두 페이지의 시가 수록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말이다.

초등학교 선생도 그렇다. 중등학교 교사와 비교해 낮은 사회적 대우를 받을 뿐만 아니라 업무 내용도 복잡하고 고달플 수 있다. 대학교 교수에 비한다면 더욱 초라하고 미천한 직업이 초등학교 교사다. 주변의 많은 교직 동료들이 시험이나 학력 갱신의 방법을 통해 중등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겨갔고 특별한 친구들은 대학교 교수가 되기도 했다. 이 어찌 부럽지 않았을까.

1970년대 이후 시골 지역을 떠나 도시로 젊은이들이 몰리기 시작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만큼 도회지에 나가야 좋은 직업이 있고 문화적 시설이 있기에 오히려 그것은 당연한 풍조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30대 중반에 고향인 충남 서천에서 공주라는 소도시로 자리를 옮겼을 뿐, 대도시로의 이주를 꿈꾸지 않았다. 말하자면 공주가 나에게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가장 밝고 큰 도시였고 내가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 같은 고장이었던 것이다.

자동차 없이 산 것은 현실적으로 내가 돈이 부족한 사람이고 운전면허가 없는 사람이어서 그렇다. 하지만 이는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의 이해와 지지가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다행히 나의 경우, 집사람이 내가 자동차 없이 사는 것을 그런대로 인정해주고 따라 주어 지금껏 자동차 없이 살아가고 있다. 오죽하면 인간의 필수적 삶의 요건으로 ‘의식주’에 자동차를 보태어 ‘의식주행’이라고까지 말하겠는가.

정말로 고집이었고 억지였다. 오히려 그 고집과 억지가 나의 길이 됐고 인생이 됐다. 나는 이제 그 모든 것을 바꾸고 싶지 않다. 아니, 바꿀 수도 없다. 기울 대로 기운 인생인데 무엇을 더 바꾸고 고치고 그런다 하겠는가. 다만 나는 나의 인생에 요구하고 싶다. 제발 내가 평생 간직해온 나의 마이너들이 거꾸로 메이저가 돼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이건 또 무슨 엉뚱한 주문이란 말인가.

실상 처음부터 메이저인 사람은 없다. 누구나 바닥에서 낮은 사람으로, 서툰 사람으로, 초심자로 출발한다. 그러다가 조금씩 좋아지고 발전해서 어느 순간 앞서는 사람이 되고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은 메이저가 되기도 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금수저란 말이 있다는데 금수저 같은 것은 애당초 없었던 것인데 허황한 사람들이 그런 말을 지어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갈림길은 자기가 꿈꾸고 좋아하는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다. 나는 인생의 성공을 ‘청소년 시절 가졌던 꿈을 평생 버리지 않고 가슴에 간직하며 살면서 노력하다가 노년에 이르러 자기가 꿈꾸었던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인생이란 마이너인 사람이 메이저가 되는 과정 그 파노라마 같은 것이다. 우리 같이 메이저가 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자. 끝까지 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메이저가 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나태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