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반도체 ‘골든타임’ 얼마 안 남아

입력 2022-12-12 04:08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시장이 아닌 정부의 힘으로 큰 흐름이 바뀐 대표적인 사례는 ‘미·일 반도체 협정’을 꼽을 수 있다. 1980년대 중반이 되면서 일본 메모리반도체는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낮은 환율, 일본 정부의 집중투자, 일본 기업의 노력 등이 더해지면서 당시 메모리반도체를 주도하던 미국 업체의 자리를 빠르게 뺏어갔다. 미국에서는 ‘제2의 진주만 공습’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결국 미국 정부가 나섰다. 일본 반도체에 대한 덤핑 혐의 조사가 이어졌고, 일본은 백기를 들었다. 덤핑 수출을 중단하고, 일본 내 외국산 반도체 비중을 20%로 늘리고, 일본 정부의 직접투자도 제한하는 등의 협정이 체결됐다. 일본 반도체는 모멘텀을 잃었고, 지금은 글로벌 반도체 경쟁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일각에서는 일본 반도체의 몰락이 미·일 반도체 협정 때문이 아니라는 반론도 나온다. 일본 기업들이 기술 개발을 등한시해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에 밀렸는데, 핑곗거리로 협정을 든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정확한 원인이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국제 정세를 잘 읽고 상황에 맞는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과 기술 개발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 세계 파운드리 1위 기업인 대만 TSMC는 최근 미국 애리조나 공장 장비 반입식을 열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리사 수 AMD CEO 등 미국 정부와 기업 관계자가 대거 참석했다. 반도체 공급망 경쟁에서 ‘미국의 위대한 승리’를 선언하는 행사였다. 애플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반도체를 쓰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미국에서 디자인한’ 제품을 정체성으로 내세웠던 애플이 ‘미국에서 생산된’ 부품까지 품겠다는 것이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자유무역과 세계화는 죽었다. 다시 돌아올 가능성도 없다”고 말했다. 그동안 최첨단 공정은 대만 생산을 고집했던 TSMC는 애리조나 공장에서 3나노 미만의 공정을 도입할 예정이다. 이 선택이 최대한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적인 관점이 아닌 미국의 의도대로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대만에서는 ‘실리콘 방패’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반도체는 과거에도 중요한 안보 자산이었다. 그동안 세계화의 흐름에서 경제성과 효율성이 우선하다 보니 패권 경쟁이 수면 아래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다. 코로나19를 계기로 반도체 공급망 붕괴 상황이 발생했고, 미·중 반도체 갈등으로 주요 국가들은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의 테두리 안에 두려는 움직임을 노골화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430억 유로를 투자해 2030년까지 EU 내에서 반도체 생산을 20%로 확대하는 걸 골자로 하는 EU 반도체법에 합의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 반도체에서 압도적인 세계 1위라곤 하지만, 실상은 살얼음판이다. 시스템반도체에선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 CPU는 인텔, AMD가 주도하고 모바일 분야 강자인 애플과 퀄컴은 PC까지 외연을 확대하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는 시스템반도체에서 입지가 점점 좁아진다. 메모리반도체에서도 낸드플래시는 중국이 턱밑까지 따라왔다. 중국 YMTC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제치고 세계 최초로 232단 V낸드를 양산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D램에 비해 기술 난이도가 낮은 낸드플래시는 수년 내 중국에 추격당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파운드리에선 주요 고객사들이 TSMC에 몰리면서 삼성전자가 계속 밀리고 있다.

기업이 열심히 뛰어도 정부가 돕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반도체산업 지원 법안은 국회에서 넉 달째 발이 묶여 있다. ‘골든타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김준엽 산업부 차장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