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비극 다시 없게… 참사현장 나무 한그루라도 있었으면”

입력 2022-12-09 04:08 수정 2022-12-09 04:08
지난달 23일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 정비 4구역 붕괴 사고 현장 앞으로 참사 당시 희생자들이 타고 있던 것과 같은 운림54번 시내버스가 지나고 있다. 광주=이한형 기자

폭격을 맞은 듯 거칠게 찢겼던 외벽은 온데간데없었다.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위로 삐죽한 철근들이 사납게 튀어나왔던 자리는 잿빛 천으로 덮였다. 스산한 겨울 하늘 아래로 행인들이 무심하게 오가는 골목은 쓸쓸함이 감돌았다. 지난달 23일 오후 찾은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붕괴 참사 현장은 많은 게 사고 전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추모의 의미

광주아이파크희생자가족협의회 대표 안정호씨가 지난달 23일 해체 작업 중인 사고 아파트를 등지고 본보와 인터뷰 중인 모습. 광주=이한형 기자

“저렇게 가려주니 마음이 조금 낫네요.” 10개월여 만에 다시 만난 광주아이파크희생자가족협의회 대표 안정호(45)씨는 사고 현장을 한참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안씨는 그날 사고로 합기도 스승이기도 한 매형을 잃었다. 매형은 올해 1월 11일 이 아파트 201동 39층 타설작업 중 그 아래 16개층이 무너져내려 숨진 노동자 6명 중 한 명이다.

안씨는 매형이 실종된 그날 이후 여섯 가족을 대표해 건설사 등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다시피 해왔다. 사고 원인과 책임자 규명은 비교적 빠르게 이뤄졌지만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이곳이 삶의 터전이라 어쩔 수 없이 참극의 현장을 맴돌며 살아야 했다. 안씨가 운영하는 체육관은 사고 현장에서 불과 2㎞ 떨어져 있다. “현장이 보일 때마다 고개가 돌려지더라고요. 매형한테 미안하니까….” 그가 눈시울을 붉혔다.

화정 참사 유가족은 앞으로 희생자를 어떻게 추모해 나갈지 막막해했다. 추모공간에 대한 논의는 붕괴된 건물을 포함해 아파트 8개동을 모두 철거한 뒤에야 시작할 수 있다. 철거부터 준공까지는 최소 5년8개월이 걸릴 전망이다. 사고 현장에 작은 공원이나 도서관을 지으려던 당초 계획도 철회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 남들에게는 혐오시설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섰다.

이들이 추모방식을 고민하며 초점을 맞춘 건 장소보다 내용이다. 같은 참사로 제2, 제3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감시자가 되겠다며 내년 1월 1주기 추도식을 시작으로 건설현장 안전 강화를 위한 결의대회를 열 계획이다. 안씨는 “참사 이후 건설현장 안전기준이 강화된 것처럼 누군가의 희생으로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계속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래야 매형도 하늘나라에서 환히 웃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태원의 앞날은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인 해밀톤호텔 옆 골목에서 행인들이 벽에 붙은 추모글을 보며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이한결 기자

지난달 21일 오후 서울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사에서 1번 출구로 올라가는 통로 좌우 벽면은 시민들이 애도의 심정을 써서 붙여놓고 간 알록달록한 메모지와 편지, 꽃으로 가득했다. 지상 출입구를 둘러싼 인도에도 새하얀 국화부터 어느새 말라버린 꽃다발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부부가 함께 일부러 광주에서 찾아왔다는 A씨(72)는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도 팽목항에 다녀왔었다”며 “이렇게 큰 사고가 났으니 현장에 한번 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왔다”고 말했다.

그날의 참사는 상인들에게도 가슴 아픈 일이다. 이들은 상권 침체를 우려하면서도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공간 조성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이태원에서 옷가게를 40년째 운영 중인 김모(60)씨는 “매일 1번 출구로 출퇴근하면서 (추모 흔적을) 보면 마음 아픈데 그 부모는 어떻겠느냐”며 “우리만 생각해서 추모공간을 치우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 사고 장소에 희생자들을 위한 제사상을 차렸던 상인 남인석(81)씨는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한다는 의미를 담아 추모공원을 변두리가 아니라 트인 공간에 밝은 분위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후속 조치 과정은 순탄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고가 난 골목은 서울시를 포함해 34명이 지분을 나눠 갖고 있어 의견 조율이 쉽지 않다. 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골목길 정비 작업도 난항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추모, 모두를 위한 일

1990년대 삼풍백화점 붕괴부터 2014년 세월호 침몰사고, 최근 이태원 참사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대형 참사를 겪을 때마다 추모공간을 놓고 갈등에 휩싸였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경우 대립은 더욱 첨예했다. 지난해 6월 9일 철거 중이던 건물이 시내버스를 덮쳐 9명이 숨진 광주 학동 참사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유족은 건물이 무너진 자리에 작은 정원을 마련하길 원하지만 재개발조합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아파트 설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게 이유지만 추모공간을 혐오시설로 보는 시각도 공존한다. 학동 희생자들이 삶을 마감한 ‘운림54번’ 버스를 영구보존하는 구상도 표류 중이다. 버스는 올해 1월부터 광주의 한 폐정수장 빈터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지난달 24일 기자가 찾아간 버스는 짓이겨진 좌석 등받이부터 산산이 조각난 유리창, 뒤틀린 내장재, 빛바랜 신문지까지 그날의 참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추모공간에 대한 청사진이 나와야 이 버스의 앞날도 결정된다고 한다.

“보존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잖아요. 현장에 나무 한 그루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모두를 위해 또 다른 사고를 막도록 경각심을 주고 싶어요.” 한 유족이 말했다.

박장군 정진영 기자 genera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