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여섯 평 남짓한 방을 느긋한 박자의 레게 음악이 채웠다. 사람들은 춤을 추듯 덩실덩실 방안을 제멋대로 누볐다. “이리 와서 같이 해요.” 정신을 차려보니 엉겁결에 강사의 지시에 따라 그들 속에서 걷고 있었다. 서로가 낯설지만 지시대로 손을 들어 다른 이와 ‘짝’ 소리나게 맞추기도, 엉덩이를 부딪치기도 했다. “손을 맞부딪힐 때, 불꽃이 튀는 것 같았어요.” 소감을 묻자 한 참가자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국민일보가 지난달 23일 ‘말랑말랑모임터’ 주소지를 따라 서울 은평구 주택가 골목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길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일반 주택 사이로 모임터가 ‘티 안 나아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은둔형외톨이(히키코모리) 청년들이 온라인 플랫폼 ‘두더지땅굴’(dudug.kr)을 거쳐 찾을 수 있도록 마련한 쉼터다. 직장과 학교, 친구와 가족과도 멀어진 청년들은 이곳에서 타인과 관계 맺는 법을 다시 익힌다.
땅굴에 모인 사람들
본보가 찾은 당일도 집 밖으로 나온 은둔형외톨이, ‘은톨이’들이 모여 있었다. 2층에서 진행된 ‘춤명상’ 수업에서 은톨이들은 따로, 또 함께 걷거나 춤을 추는 등 몸을 움직이며 타인과 어울리는 연습을 했다. 참가자 A씨는 “다른 데선 공감이나 이해를 받지 못한다고 느꼈지만, 이곳에선 그런 게 해소된다”고 말했다. 한때 6년 동안 은둔했다고 털어놓은 그는 과거의 자신처럼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앞서 진행된 자조(自助)모임에서는 참가자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사회나 가족이 기대하는 모습을 충족 못해 갈등했다는 얘기가 많았다.
히키코모리 생활을 경험한 일본인 청년도 이날 찾아와 사연을 공유했다. 자신과 비슷한 사연에 때로 웃음과 농담도 흘러나왔다. 그다음 날은 3~4명이 조를 이뤄 파스타와 샐러드를 만드는 요리 수업이 진행됐다.
두더지땅굴이 공식적으로 문을 연 건 약 석 달 전이다. 운영단체인 사단법인 ‘씨즈’는 앞서 지난 5월부터 은톨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자조모임과 블로그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본래는 파티룸을 빌려 모였지만 대외활동이 익숙지 않은 이들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 현 모임장소인 말랑말랑모임터를 주택가에 마련했다. 마음 편히 찾고 쉬다 가도록 분위기를 가정처럼 아늑하게 꾸몄다.
땅굴 지나 바깥으로
은둔형외톨이는 부모가 나서지 않는 이상 집 밖으로 나오는 일 자체를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엔 부모가 집 밖으로 데리고 나오기도 어렵다. 두더지땅굴 운영을 총괄하는 씨즈의 오오쿠사 미노루(46) 고립청년지원팀장은 “대인공포증이 있거나 우울증이 있다면 모이는 일 자체가 어렵다. 개인 의지 문제가 아니다.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오는 일 자체가 힘들다”고 했다.
온라인플랫폼인 홈페이지 두더지땅굴은 은둔형외돌이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한다. 당사자 경험담을 접하거나 자신의 은둔 성향을 테스트해볼 수 있다. 상담을 신청하거나 말랑말랑모임터로 나와 활동할 수도, 사회로 나오기 힘든 정도에 맞춰 작은 일거리를 맡고 보수를 받을 수도 있다. 오오쿠사 팀장은 “사람마다 (은둔한) 단계가 다르다. 각자의 단계에 맞춰 할 수 있는 일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씨즈 관계자는 “은둔형외톨이는 다른 공간에서 일반인과 어울리는 걸 벅차한다. 비슷한 상처를 공유하거나 공감받고 싶어하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참가자 B씨는 “20대보다 30대를 많이 만난다. 20대 때는 뭐라도 시도하는 사람이 많지만, 학교나 직장에서 한 번씩 상처를 받으면 30대까지 그대로 은둔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고 말했다.
지금 두더지땅굴의 아지트 격인 말랑말랑모임터로는 전국의 은톨이들이 찾고 있다. 수도권을 벗어나 아주 먼 지역에서도 오는 이가 있다. 도움을 받을 곳이 주변에 마땅치 않다는 이야기다. 오오쿠사(사진) 팀장은 “지난 2월부터 상담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신청한 인원이 지금까지 약 400명, 상담으로 이어진 사례가 260여명이다. 아직 대기자가 많다”고 말했다.
드러나지 않은 은톨이
국내 은둔형외톨이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은 2019년 외출 정도에 대한 설문 결과를 근거로 은둔형외톨이 청년이 37만여명일 것이라 추산했다. 코로나19가 닥친 이듬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된 걸 고려하면 더 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보건복지부는 내년 은둔형외톨이 현황을 조사할 예정이다.
오오쿠사 팀장은 일본에서 건너와 11년째 한국 은둔형외톨이 문제를 다뤄왔다. 그는 한국과 일본 두 사회가 은둔형외톨이 문제에서 닮은 점이 있다고 했다. 두 나라 모두 사회·가족으로부터 인정받는 기준이 높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야 인정받는 환경에선 있는 그대로의 나는 가치 없다고 여기게 된다. 기대대로 살지 않으면 제정신이 아니다, 인생 포기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사회와 부모로부터 눈치를 받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문제를 대하는 온도차는 크다. 그는 한국 생활 초반 은둔형외톨이 문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가 일본과 달리 관심이 적은 걸 보고 한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서는 일본보다도 은둔하는 이유를 당사자에게서 찾는 경향이 심하다”고 말했다. 또 “일본 사회는 아직 공동체주의 문화가 남아 있어 약자를 지역사회가 안고 가자는 정서가 있지만, 한국은 일본보다도 공동체가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런 점에서 은둔형외톨이 문제는 한국에서 더욱 심각하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오오쿠사 팀장은 “(지금의 한국 사회는) 청년들이 용기와 동기를 갖고 열심히 살도록 해주지 않는다. 해봤자 안 된다는 걸 경험해 무기력하게 만들고 좌절감을 안기는 사회”라며 “신자유주의, 능력주의적인 사회 풍조가 이대로 이어진다면 은둔형외톨이는 갈수록 더 많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