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지난주부터 시작한 639조원 규모의 2023년도 예산안 심사가 여야의 정쟁에 표류를 거듭하고 있다. 세금을 낭비할 수 없다는 말을 앞세우지만 예산안을 꼼꼼히 따지는 책임있는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여야는 매년 예산안을 놓고 대치하며 공방을 벌였다. 하지만 올해는 유독 심하다. 더불어민주당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예산안 시정연설을 보이콧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됐던 일이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정쟁만 앞세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국가 살림살이를 볼모로 벌이는 극단적인 정치싸움을 당장 멈춰야 한다.
여야는 16일 국회 운영위원회 등 상임위원회를 열어 예산안을 심사했지만 난항을 거듭했다. 운영위에서는 대통령실 이전 예산을, 국토교통위원회에서는 용산공원 개방 예산을 두고 말싸움만 벌였다. 무엇보다 의석수가 169석인 거대 야당이 윤 대통령 공약 이행 관련 예산을 집중적으로 삭감하는 게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민주당은 행정안전위원회에서 경찰국 예산을,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는 청와대 개방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경찰국 예산 삭감에 항의해 퇴장한 사이에 이상민 장관의 업무추진비를 50% 넘게 깎기도 했다. 그렇다고 국민의힘이 국정을 책임진 여당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도 아니다. 민주당이 의석수로 밀어붙인다며 여론에 기대려 할 뿐 진지한 협상에 나서지 않고 있다. 오히려 야당 의원들을 자극하며 ‘할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는 동안 일부 상임위에서는 여야가 합의를 이루지 못해 정부안을 수정없이 예산결산위원회로 보내는 일까지 벌어졌다.
예산안 법정처리 시한은 12월 2일이다. 여야가 지금처럼 무책임하게 정치싸움에만 몰두한다면 이 시한을 지키지 못할 게 분명하다.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향한 검찰 수사 등으로 여야의 공방이 잦아들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연말까지 예산안이 처리되지 못해 내년에는 준예산을 편성해야 한다는 걱정이 벌써부터 나오는 이유다.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극적으로 합의한다면서 몇몇 의원의 지역구 예산만 잔뜩 챙기고 적당히 담합하는 것은 아닌지도 걱정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하는 국민들은 답답하다. 기업은 돈줄이 말라가고 가계는 치솟는 물가에 한숨을 쉬고 있다. 당장 나라 안팎의 경제난을 해결할 대단한 묘수를 내놓으라는 게 아니다. 국민의 고통에 공감하고, 국회의원에게 주어진 의무만이라도 제대로 해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