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비정규직에게도 직무급을

입력 2022-11-17 04:02

외국과 달리 한국의 노동조합은 직무급을 반대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직무급을 도입하면 연공급보다 임금이 깎일 수 있고 직무평가를 관리자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불신 때문이다. 대기업의 인사관리자도 직무급은 직원 간 불화만 초래할 뿐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며 소극적이다.

기업 입장에선 연공 임금체계가 단순하고 간편하긴 한데 경직적이고 고비용인 게 문제다. 성장률이 2%가 될까 말까 하는 저성장 시대에 매년 호봉 상승만으로 2% 안팎의 임금 인상을 보장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늘어나는 비용 부담을 비정규직과 하청, 플랫폼 노동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흡수해 왔지만 그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은행권의 명예퇴직 연령이 40대 중반까지 내려가고 임금 피크제에 대한 시비도 끊이지 않는다.

모든 분야에서 디지털 전환이 본격화되고 20~30대 전문기술 인력들이 노동시장의 주축으로 떠오르며 연공 중심의 임금 결정과 인사관리가 과연 공정하고 합리적인가라는 문제 제기도 늘고 있다. 이들은 평생 고용이 보장될 것도 아니고 한 직장에서 연공을 차곡차곡 쌓기보다 능력과 실적에 따른 보상을 그때그때 받고 직장을 옮겨가며 커리어를 발전시키는 데 익숙하다. 150만명에 달하는 경력 단절 여성도 연공주의 인사관리의 간접 피해자다. 출산과 육아를 마치고 재취업할 때 이들은 과거의 근속과 연봉을 인정받지 못하고 비정규직 노동시장을 전전하는 경우가 많다. 대기업의 연공서열을 뚫기도 어렵고 중도 채용의 기회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역대 정권이 늘 그랬듯이 윤석열정부도 직무·성과급 도입을 최우선 노동개혁 과제로 올려놓았다. 노사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이다. 공공기관의 경우에는 그나마 기관 평가라는 압박 수단이라도 있지만 민간기업에 대해서는 정부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근거도 없다. 잘해야 임금 통계 좀 개선하고 컨설팅 서비스를 지원하는 수준일 것이다. 아마 시장은 꿈쩍도 않을 것이다.

정부가 연공 임금체계를 개편해야 할 이유는 대기업 노사가 원해서가 아니라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연공 중심의 인사관리에 큰 불만이 없다. 그 비용을 기업 밖의 비정규직과 하청, 플랫폼 노동에 떠넘길 수 있을 때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화물연대와 택배노조, 학교비정규직노조와 대우조선 하청노조의 분쟁 사례에서 보듯이 사각지대에서 노사 갈등이 터져 나오고 있다. 노동시장 전체로 보더라도 인력 활용의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다. 이중구조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고학력의 청년과 경력 단절 여성들은 대기업 정규직 일자리에 더욱 매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문재인정부는 이를 개선하겠다고 비정규직 정규직화도 해보고 최저임금도 올려보았지만 양극화 구조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제 질문을 바꿔 보자. 비정규직과 하청, 플랫폼 노동에 적용하는 임금체계는 무엇인지, 그들의 경력과 역량 개발은 누가 관리해주는지 그리고 그들을 위한 고충 처리나 사회보장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따져보자.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 취업자들은 각자도생의 자유방임 시장에 방치돼 있기 때문에 직무에 상응하는 임금체계도 없고 오랜 경력도 의미가 없다. 누구든 경력을 쌓고 자격을 따면 거기에 맞게 고용 지위도 높아지고 임금도 올라가야 발전할 수 있다. 그래야 노동의 질도 높아지고 생산성도 오른다.

비정규직 노동시장의 현대화라는 상향식 개혁이 병행돼야 이중구조도 더 빨리 허물 수 있다. 비정규직과 하청 노동자들의 공정임금과 경력 관리, 교육 훈련에 필요한 인프라를 현대화하는 것은 정부의 책무다. 지난 10월 말 정부가 발표한 조선업 노동시장 구조 개선 대책은 이러한 방향으로의 정책 전환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더 나아가 건설이나 소프트웨어 개발, 문화콘텐츠 생산 등 비정규직 밀집 업종을 직무 중심의 전문직 노동시장으로 현대화한다면 이중구조 개선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여러 업종으로 확산하고 폭넓은 공론화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모아내면 좋겠다. 마침 김문수 위원장도 안 들리는 목소리를 찾아 더 낮은 곳으로 가겠다고 한다. 그들의 문제를 사회적 대화 테이블에 끌어올려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길 기대한다.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