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할지 고민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문과와 이과 가운데 어디를 추천하겠는가. 한국리서치가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벌여 지난 7월 내놓은 결과를 보면, ‘인문사회’와 ‘자연공학’ 가운데 자연공학을 추천하겠다는 응답이 85%에 달했다. 그 이유로 나온 답변은 ‘취업’(38%) ‘전망소득’(24%) ‘향후 선택지가 많아서’(22%) 순이었다.
인문계 기피 현상은 물론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뜻의 ‘문송합니다’라는 말은 얼마쯤 상투적 표현이 됐고, 인문계 대학생 90%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는 ‘인구론’이란 신조어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 14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올해 하반기 기업들이 신규 채용할 인원 10명 가운데 7명은 ‘이공계열 졸업자’라고 한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담론이 유행한 지는 오래됐다. 드문드문 ‘인문학 열풍’이라는 기사가 신문 지면을 장식할 때가 있으나, 그 내막을 자세히 살피면 허무해질 때가 적지 않다. 인문학을 내건 행사든 책이든 왠지 짝퉁 인문학 느낌을 줄 때가 많아서다. 인문학을 멋으로 걸치는 액세서리쯤으로 여긴다고나 할까. 아무튼 인문학의 위기는 세계적 현상이기도 해서 많은 국가에서 인문학 분야 지원금을 삭감하는 일이 빈번하게 이어지고 있고, 외신을 검색하면 지구촌 곳곳에서 인문학 전공자가 취업 문제 탓에 힘들어한다는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당연히 문과대학, 둘레를 좀 더 넓히면 비(非)이공계 대학의 위기를 포함하고 있다. 대입 시장에서 ‘문과대학 진학’이라는 상품을 사려면 얼마쯤 용기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언젠가 저널리스트 고종석은 한 칼럼에서 “(문과 대학이) 시장 너머로 가려면 우선 시장을 통과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는데, 시장의 쓸모를 다한 인문학의 처지를 떠올리면 문과 대학이 시장을 통과할 가능성은 당분간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문과 대학의 초라한 위상은 앞으로도 꾸준히 인문학 경시 풍조를 풀무질할 것이다.
문제는 법학이나 경제학 어쩌면 의학을 공부한 학생도 머지않은 미래에 지금의 인문학 전공자가 겪는 팍팍한 현실을 마주할 것이라는 데 있다. 많은 학자가 전망하듯 미래 사회의 조종간을 잡는 학문은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이고, 이들 기술의 발전 탓에 인간의 일자리는 점점 사라질 것이다.
누군가는 직관이 필요한 업무, 예컨대 붐비는 거리에서 차량을 운전하거나 은행에서 낯선 사람을 상대로 대출 업무를 하거나 협상에서 미묘한 흥정을 벌여야 하는 직업은 미래에도 ‘인간의 일자리’로 남을 거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직관이라는 것이 호르몬이 만드는 생화학적 알고리즘이란 걸 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생명기술이 가미된 인공지능은 인간 일자리의 대부분을 대체할 수 있다.
유발 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라는 책에서 선득한 전망을 늘어놓은 뒤 이렇게 적었다. “2050년이면 ‘평생직장’이라는 생각뿐 아니라 ‘평생 직업’이라는 생각까지 원시적이라고 간주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19세기의 마차 몰이꾼이 아닌 말의 운명을 맞을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무용(無用) 계급’의 출현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사회적 쓸모를 다한 인간이 양산될 것이라는 의미다. 하라리가 내세우는 키워드는 인간이 사회와 ‘관련성’을 잃게 되는 ‘무관함(irrelevance)’이다. 우리는 ‘무관함의 시대’가 돼서야 인문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불문학자 황현산은 “인문학은 무슨 말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될 말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상대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무관함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 인문학의 중요성을 벌써부터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해서는 안 될 말,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말이다.
박지훈 종교부 차장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