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히 현금을 건네는 장면이 녹화된 CCTV 영상 같은 건 애초에 없다. 시중은행 띠지로 돈다발을 묶는 아마추어 범죄자도 더는 없다. 비자금 수첩의 메모와 누구에게 전달하라는 녹음은 귀한 물증이지만 법원이 ‘직접 증거’로 분류하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금품수수 사건은 결국 서로가 진실임을 주장하는 이들 틈의 진술 신빙성 싸움이 된다.
법관들은 때로 “전부 진실을 말한 이도, 전부 거짓을 말한 이도 없더라”고 토로한다. 일부는 의도적으로, 또 누군가는 기억의 한계 때문에 허위나 과장, 왜곡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같은 현상을 각기 달리 기억하는 ‘라쇼몽 효과’가 거론되고, “피고인의 진정한 속마음을 모르겠다”는 판사의 토로가 판결문에 담기기도 한다. 공여자와 수수자가 완전히 다른 말을 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측근들의 뇌물·정치자금 수수 사건의 경우도 법원은 과연 누구 말을 더 신뢰할 수 있는지 가려내야 한다.
“불편한 자세로 돈을 줬다?”
금품수수 여부 실체를 찾으려는 법정에서는 공소사실로 특정된 시기와 장소를 중심으로 온갖 사소한 것들이 따져진다. 두꺼운 옷을 입던 때였는지, 쇼핑백을 들고 어느 문으로 들어와 어떤 엘리베이터를 탔는지, 책상에 있던 결재판 색깔이 무엇인지, 좌석의 배치가 잠깐 열린 문틈으로 만남을 목격한 이의 기억과 같은지…. 무수한 ‘디테일’들은 사건 관계인 틈에서 일치하거나 어긋난다.
우리 법원은 유죄 의심이 있더라도 공소사실에 특정된 일시와 방법대로의 범행이 입증되지 않으면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 무죄를 선고한다. 이는 진의장 전 통영시장에 대한 대법원의 무죄 취지 판결 이후 더 굳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진 전 시장은 2006년 이국철 전 SLS그룹 회장에게 미화 2만 달러를 나눠 받은 혐의로 기소돼 항소심까지 유죄를 선고받아 법정구속됐었다.
대법원은 이 전 회장이 당시 “경비 좀 넣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홍콩 출장을 다녀온 후 금품을 제공했다”는 공소사실과 어긋난다고 봤다. 나이가 어린 이가 윗사람 쪽으로 몸을 구부려 불편한 자세로 돈을 건넸다는 진술이 경험칙상 부자연스럽다는 판단도 했다. 이 전 회장은 진 전 시장의 왼쪽에 앉아 있다가 몸을 구부려 진 전 시장 오른쪽에 있는 협탁 서랍에 돈을 넣었다고 했다. 이후에는 뇌물 거절 걱정이 사라져 진 전 시장이 앉은 의자 팔걸이와 그의 왼쪽 다리 사이에 봉투를 끼웠다고 진술했었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됐던 홍준표 대구시장의 무죄 근거도 세부 정황 진술의 모순이었다. 공소사실은 윤승모 전 경남기업 부사장이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1억원을 쇼핑백에 담아 2011년 6월 3일부터 22일 사이 의원회관에 있는 홍 시장의 사무실로 가서 건넸다는 것이었다. 윤 전 부사장은 국회 남문에 도착해 면회실로 출입했다는 이동 경로를 도면으로 그렸는데, 당시 의원회관은 증축공사 중이라 진술대로의 출입이 불가능했다. 윤 전 부사장이 기억한 홍 시장 집무실의 소파 배치는 실제 배치와 일치하지 않았다.
2심은 1심 유죄를 뒤집고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하지만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놨다. 성 전 회장이 홍 시장에게 공천 등 아무런 혜택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 굳이 집이 아닌 의원회관이 뇌물공여 장소로 택해진 점도 의심했다. 윤 전 부사장이 1억원 전달을 ‘평생 한 번 있는 경험’이라 진술한 점은 오히려 홍 시장의 이익으로 판단됐다. 특별한 경험이었다면 기억이 객관적 상황에 보다 부합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고 가려던’ 이의 진술 신빙성
대장동 사건을 재수사한 검찰이 불법 경선자금 수수 혐의로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재판에 넘기자, 야권에서는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이 믿을 만한 인물이냐는 항변이 나왔다. 회유 의혹도 제기됐다. 유 전 본부장의 진술 신빙성은 법원이 검증할 주요한 대목 중 하나다. 진술자의 인간됨, 궁박한 처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진술에 영향을 미쳤는지의 여부까지 모두 아울러 살피라는 것이 대법원 판례다.
금품 제공자가 윗선을 보호하려고 처음에는 입을 닫았다가 심경의 변화로 진술을 꺼내는 사례는 전에도 있었다. 전군표 전 국세청장 뇌물수수 사건과 대장동 불법자금 사건은 전개상 유사한 점이 있다. 건설업자로부터 1억원을 받아 2007년 구속된 정상곤 전 부산지방국세청장은 “30년간 몸담아 온 조직에 피해를 줄 수 있다”며 검찰의 용처 추궁에 함구했었다. 하지만 이후 후임 청장이 접견을 와 “전 전 청장에게 얼마를 줬는지 모르지만 얘기해 봐야 좋을 것 없다”는 식으로 협박하자 모멸감을 느꼈다.
그는 “내 죄가 늘어난다는 것을 안다”면서도 검찰에 ‘상납’ 사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전 전 청장 측은 “결코 청렴하고 성실한 공직자가 아니다” “서운한 감정에 복수한다”며 정 전 청장의 도덕성까지 공격했다. 하지만 정 전 청장이 궁박한 처지를 벗어나려고 상납을 진술한다는 전 전 청장 측의 주장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장동 사건에서 유 전 본부장은 “내 죗값만 받겠다”고 말하고, 김 부원장은 공소사실을 소설이라 한다. 법원은 모든 진술과 증거자료를 논증해 유무죄 판단의 천칭 위에 올리게 된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말하기 어려운 구체적인 진술인지, 그리고 그 개개의 기억이 당시의 실제 상황에 부합하는지가 우선 검증된다. 공소사실이 법관의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면 유죄, 그렇지 못하면 무죄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