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라 모네 머레이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가톨릭 고등학교를 다니는 여고생이었다. 학교 우등생이자 농구 선수로 활약했다. 팀의 득점을 이끄는 타고난 리더였고, 자기 결정력이 뛰어난 젊은 여성이었다. 아키라는 휴가를 보내기 위해 가족과 함께 플로리다주 중부 관광도시 올랜도를 방문했는데 그때 겨우 18살이었다.
프랭키 지미데제수스 벨라즈케즈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으로, 푸에르토리코 수도 산후안에서 대학을 마치고 미국 올랜도로 이주했다. 50세였던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비주얼 머천다이저인 ‘올드맨’을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문구가 있는 티셔츠를 장난스럽게 올려놓기도 했다.
22살의 후안 라몬 게레로는 텔레마케터로 일하다가 대학에 입학했다. 아직 뭘 공부해야 할지 몰랐지만 대학 생활은 즐거웠다.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했을 때 가족들은 그가 행복하다면 모두 괜찮다고 받아들였다. 후안은 정신건강 분야에서 일하는 32세의 크리스토퍼 앤드루 레이노넨과 사랑하는 사이였고, 머지않아 둘은 결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가족은 결혼식 대신 합동장례식을 치러주어야 했다.
2016년 6월 12일 새벽,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나이트클럽 펄스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총 49명이 희생됐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최악의 테러 사건이자 성소수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발생한 증오범죄로 미국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올랜도 시는 사건 다음 날부터 신원이 확인되는 대로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다. 지금도 당시 희생자 이름과 나이가 공개된 올랜도 시의 별도 홈페이지를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뉴욕타임스는 희생자들의 이름, 얼굴과 함께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이들이 들려주는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실었다. 덕분에 우리는 마음속으로 찬찬히 그들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고, 그들의 얼굴을 보듬듯 가만가만 들여다보면서 그렇게 희생되면 결코 안 됐을 한 개인 개인의 죽음을 애도할 수가 있다. 서둘러 수습하고 털어내야 할 끔찍한 사건의 ‘사망자’로서가 아니라 제각기 삶과 꿈을 가진 인간이자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고 친구이며 연인이고 동료였음을 기억하고 추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시 가장 어린 희생자였던 18살의 아키라가 흰 졸업가운을 입고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캡모자 아래로 희끗희끗한 짧은 머리가 보이긴 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직업과 일을 즐겼을 프랭키의 얼굴을, 또 다른 얼굴 얼굴들을 바라보면서, 다시는 다시는 그와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우리 모두 다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미국 CNN 간판 앵커인 앤더슨 쿠퍼는 자신의 이름을 건 시사프로그램 ‘앤더슨 쿠퍼 360°’를 생방송으로 진행하면서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올랜도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들을 한 명씩 거명했다.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바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 방식에 대해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대통령이던 도널드 트럼프도 사건 1주기가 되는 날, 트위터에 희생자들의 얼굴 사진을 올리며 희생자들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썼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건 나이트클럽에 갔든 핼러윈 축제를 즐기러 갔든 희생자들의 탓이 아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던 행정당국과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정부에 책임을 따져 묻는 건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의 필수요소다.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 책임을 전가하고 발뺌하면서 그 자리에 버티고 앉아서 이름과 얼굴을 당당히 내밀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적 참사로 희생된 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가리고 누가 감히 국민 앞에서 ‘패륜’을 말하는 것인가? 끔찍한 참사는 참사 후에도 끔찍하게 계속되고 있다.
최현주(카피라이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