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시는 망하지 않았다

입력 2022-11-16 04:07

요즘 시인들은 스스로 시의 시대가 갔고 시가 죽었다고 말한다. 문학 잡지를 읽지 않고 서점에서 시집이 안 팔리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많이 다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왜 그런가? 인간에게 감정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감정이 남아 있는 한 시는 망하지 않는다. 인간을 떠나지 않는다. 그런 현상은 코로나19를 견디는 동안 더욱 심해졌다고 본다. 서점가의 정보에 의하면 코로나19 동안 시집 판매지수가 늘었다고 한다. 다만 빈익빈 부익부, 쏠림 현상이 걱정스럽긴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글 쓰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독자 대중과 동행할 수 있는지, 독자에게 환영받는 글을 쓸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시대적 담론이 달라졌다. 거대 담론, 상층 담론이 깨지고 생활 담론, 개인 담론이 대두된 것이다. 대부분의 집단 논리가 사라지고 개인 논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그런 현상은 MZ세대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내일에 투자하지 않고 ‘오늘’에 투자하고 타인의 일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자기’의 일에 오로지 관심을 둔다. 일견 이것은 의식이 깨어나고 맑아진 것을 말하는데 그런 관계로 우울해지고 외로워진 것도 사실이다.

이런 현상을 수수방관 바라보기만 할 것인가. 시인들이 나서서 도움을 줘야 한다. 마음이 지옥인 사람들을 당장 어떻게 해줄 수는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마음의 이해자, 위로자, 동행자는 충분히 될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들은 대중들 마음을 돕는 일을 해야 한다.

나는 평소 시인을 대중들 마음을 돌보는 감정의 서비스맨이라고 생각해 왔다. 시 작품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수평의 시대다. 물도 수직으로 떨어지면 폭포가 돼 그 아래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다. 수평이 돼야 한다. 그것이 소통이고 상호작용이고 감흥이고 감동이다.

나아가 시는 사람을 살리는 약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울증 치료제로 사용되는 약 가운데 세로토닌이란 약이 있다는데 시가 바로 그 세로토닌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시대 시인과 시의 존재가치는 많이 희박해진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가 보다 더 작아지고 가벼워져야 한다.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멀리까지 날아가서 지치고 힘들고 우울하고 답답한 사람들 가슴에 내려 꽃이 되고 샘물이 되고 약수가 돼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살려내야 한다.

절대로 시인이 혼자만 고귀한 척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독자들에게 그것은 통하지 않는 태도다. 독자들은 감정의 이웃과 동지를 요구하고 있다. 시인이 시로서 아는 척, 잘난 척, 거룩한 척해서는 안 된다. 시인은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독자들 곁으로 다가가서 독자들과 호흡을 같이하고 눈길을 맞추어야 한다.

예전엔 유명한 시, 유명한 시인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유용한 시인, 유용한 시가 필요한 시대다. 시인은 동떨어져 있는 고고한 존재가 아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고 먼 길을 동행하는 사람이다.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친구이자 이웃인 사람이다.

시는 아직도 망하지 않았다. 시의 시대는 절대로 가지 않았다. 다만 시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시는 망한 것이고 시의 시대가 갔노라 말하는 사람에게만 시의 시대가 간 것이다. 끼니때 길거리에 넘쳐나는 사람이 배고픈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손님이 들지 않는 식당이 있다면 그 책임은 손님에게 있는가, 아니면 식당 주인에게 있는가?

나태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