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원하시는 유족분들은 적어주세요.’ 추수감사주일을 일주일 앞둔 지난 13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입구 옆 가게 앞 한 교회의 화이트보드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10·29참사가 있었던 바로 그곳이다. 보드에 붙은 희생자들의 사진은 부슬비 속에 더 쓸쓸해 보였다. 다행히 대형 비닐이 시민들의 추모 공간을 비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다. 사고 현장에서 300여m 떨어진 대로변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이태원감리교회(지상천 목사)는 오전 8시 1부 예배를 시작했다. 성도들은 타종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입례송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9장)이었다. 노랫말이 이태원 참사로 힘든 유족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지상천 목사는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것’(엡 2:10~13)이라는 설교에서 “인생은 유한하다. 말씀이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하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달아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하면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예배당 장의자에 꼿꼿하게 자리한 성도들은 설교를 경청했다.
예배 후 담임목사실에서 지 목사를 마주했다. 그는 “사고 후 뭔가를 말하기가 참 힘들었다”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이태원감리교회는 평소대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데 집중했다고 한다. “우리 교회는 현장에서 정말 가깝다. 교우들 다수가 이태원 상인이고 용산구청장도 우리 교우다. 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 자체가 지금 우리가 할 일인 것 같다”고 했다.
추수감사주일에도 특별한 행사 계획은 없다. 지 목사는 “교역자가 추수감사주일 행사를 몇 가지를 제안했는데 하지 말자고 했다. 예년처럼 새벽기도회에서 이 지역과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참사에 대해 말을 아꼈다. 다만 “근본적인 원인은 젊은이들에게 분출구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기성세대이자 목회자로서 이 부분이 가슴 아프고 미안하다”고 했다.
하나님 안의 삶이 최대 감사
참사 현장이 있는 이태원로에서 언덕 방향으로 450m가량 올라갔다. 이태원제일교회(송영회 목사)의 2부 예배(오전 11시)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머리 희끗희끗한 성도들이 환한 예배당에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조용한 찬송가 반주가 어디선가 흘러나왔다. 찬송가 ‘여기에 모인 우리’(620장)가 나오자 맨 앞자리 한 성도가 허밍을 시작했다. 허밍을 하던 그가 가사를 낮게 읊조리자 성도들도 따라 했다.
“주께서 뜻하신 바 우리 통해 펼치신다…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 주신다~.” 가는 목소리가 예배 처소를 더 거룩하게 만들었다. 송영회 목사는 설교에서 “예수님은 죽음의 무게를 아셨기 때문에 죽었던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불쌍히 여기고 살리셨다”며 “예수님이 죽은 뒤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큰 희망을 갖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했다.
성도들은 이태원 지역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송석순 권사는 기도에서 “주님이 10·29참사로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길 바란다. 우리가 이 지역을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지 못한 것을 회개한다”면서 “우리 교회의 기도와 전도로 이태원이 유람선이 아니라 구원선이 되게 해주시라”고 했다. 성도들은 송 권사의 기도에 “아멘”으로 화답했다.
예배 후 황정희 은퇴장로와 대화를 나눴다. 황 장로에게 그리스도인이 고통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지요.” 황 장로의 생각은 이 교회 성도들의 생각과 비슷했다. 이태원제일교회는 지난 14일부터 18일까지 ‘감사-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안에 사는 삶’(롬 8:1~39)을 제목으로 추수감사절 특별저녁기도회를 가졌다.
수직 감사에서 동심원 감사로
한국교회에서 이 감사를 수직에서 수평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하는 이가 있다. 30년 넘게 감사 운동을 해온 이의용 아름다운동행 감사학교 교장은 18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수직 감사에 익숙하다”면서 “물질, 재능을 받은 자(taker)로서 하나님에게 수직 감사하는 것에서 나아가 나누는 자(giver)로서 이웃에게 수평 감사하는 데까지 감사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이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존재와 사건에 대해 감사하는 동심원(同心圓) 감사로 볼 수 있다. 이 교장은 감사학교 수업에서 감사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감사를 실천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또 ‘감사 동아리’를 만들어 운영하는 법을 안내한다. 그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살전 5:16~18)처럼 범인(凡人)과 범사(凡事)에 감사하며 샬롬의 삶을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
많은 교회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이런 동심원 감사를 실천한다. 온누리교회(이재훈 목사)는 쌀을 사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교회, 기관에 전달하는 ‘사르밧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사르밧은 BC 9세기 이스라엘 왕국 아합과 아하시야왕 시절 활동하던 예언자 엘리야에게 떡을 만들었던 과부가 살던 지명이다. 온누리교회 관계자는 “지난해 20㎏짜리 2000여 포대를 나눴는데 올해는 3000여 포대를 살 수 있는 헌금이 들어왔다”고 했다.
온누리교회는 추수감사 절기마다 순별로 사르밧 프로젝트 헌금을 모은다. 교회는 이 헌금으로 경상도와 전라도 농촌지역 교회 6곳에서 성도들이 직접 농사지은 햅쌀을 산다. 이후 추천받은 대상자들에게 이 쌀을 택배로 보내고 있다. 한사람교회(서창희 목사)는 이번 추수감사절 헌금을 부산의 미혼모 시설, 교회 인근 청소년 시설 등 4곳에 기부할 예정이다.
수레바퀴로 대림절 리스를 만든 것처럼
추수감사절은 한 해의 농사를 끝내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다.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1621년 가을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드린 것을 유래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일각에서는 프랑스 개신교도였던 위그노들이 1564년 플로리다 잭슨빌 캐롤라인 요새에서 추수 감사를 했다고 한다. 위그노들은 당시 감사의 시편을 노래했다. 바로 장 칼뱅의 ‘제네바 시편 찬송가’였다.
신대륙에서 처음 불린 찬송가는 시편이란 얘기다. 구약에서는 밀 추수에 감사하는 맥추절이 추수감사절과 관련이 있다.(출 23:16) 미국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1914년부터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킨다. 북유럽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의 시간과 신앙의 진리를 통합하는 풍습을 가졌다. 해가 짧아지면 하던 일을 중단하고 수레에서 바퀴를 뗐다.
그들은 이 바퀴를 나뭇잎과 불빛으로 장식한 뒤 현관에 걸었다고 한다. 대림절 리스(wreath·화환)의 유래다. 신학자 유진 피터슨은 그의 저서에서 “(리스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내면을 살펴야 할 시간이란 표시이자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께 빛과 온기를 달라는 호소”라고 했다. 본격적인 소비사회가 되기 전까지 기독교 절기는 성스러운 축제였다. 핼러윈은 모든 성인을 기념하던 로마가톨릭 축일인 11월 1일 만성절(萬聖節) 이브였다.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은 그다음 날부터 시작되는 파격 세일 ‘블랙 프라이데이’ 이미지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12월 성탄절은 미국에선 연말 휴가 기간으로, 한국에선 연인들이 선물을 주고받는 날 정도로 인식된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더 친밀해지기 위해 경건한 절기 문화를 회복해야 한다. 절기 안에서 시간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