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에 입사하고 난 후 선배들과 저녁 자리를 함께할 때면 취재 무용담을 넘치게 들었다. 대부분의 옛날이야기가 그렇듯 선배들의 기억은 때로는 과장처럼 들렸지만 인상 깊은 얘기도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 당시 취재기였다. 상판이 무너져 내린 다리의 끝부분까지 쫓아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상황 파악을 한 후 이를 보고하기 위해 수십분을 달려 전화가 있는 가게를 수소문해서 사정사정한 끝에 전화를 빌려 보고했다는, 뭐 그런 얘기였다.
무용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사고 현장에서 취재한 후 전화가 있는 가게를 찾기 위해 수십분을 달렸다는 대목이었다. 삐삐의 시대에 겨우 적응할 때쯤 신문사에 입사한 세대로서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보고를 위해 수십분 동안 가슴이 터지도록 달려야 하는 상황도 있구나, 현장에서 취재할 때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정말 난감하겠다,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중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 요즘 신입 기자들이 이런 취재 무용담을 들었다면 반응이 달랐을 것이다. 대다수는 ‘대체 무슨 소리지?’하고 의아해할 것이 분명하다. 휴대전화가 없는 생활을 해보지 못한 세대에게 유선전화조차 찾기 힘들던 시대의 전화와 관련된 무용담은 까마득한 옛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정보화 시대에 경험의 가치가 추락하는 것은 필연이다. 30대와 40대가 공유하는 경험의 크기는 40대와 50대의 그것보다는 훨씬 작아 보인다. 20대와 30대가 공유하는 건 더 작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크기는 더 작아질 것이다.
오랜 기간 대화를 통한 경험의 교환은 세대나 계층을 연결해주는 수단이었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위에 설 수 있도록 해준 능력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연결된 정보화 시대에 대면을 통한 경험의 교환은 가치가 급전직하했다. 변환 버튼만 누르면 알아서 한자로 바꿔주는 프로그램을 쓰는 이들에게 “벼슬 환(宦) 몰라? 갓머리 아래에 신하 신 들어가 있는 글자”라고 전화로 기사 속에 들어갈 한자를 설명해야 했던 경험담이 큰 감흥을 주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독일의 평론가 발터 베냐민은 인터넷이 세상에 등장하기 오래전인 1936년 발표한 에세이 ‘이야기꾼(storyteller)’에서 정보와 이야기의 차이를 언급하며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이야기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경험은 바닥없는 나락으로 계속 추락하고 있는 것 같다”며 경험의 가치 추락을 안타까워했다.
경험의 가치가 추락하는 자리에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정보다. 산업화 세대가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민주화 세대가 어떤 고난을 감내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젊은 세대들이 어떤 점에서 기성세대보다 더 고통스럽고 더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과 공감한다는 것은 다르다. 사람의 경험이 녹아 있지 않은 정보는 베냐민의 지적처럼 그것이 새로울 수 있는 순간을 지나면 가치를 상실한다.
나이가 50세 전후로 비슷한 유재석과 강호동, 신동엽이 10여년 넘게 주요 연예프로그램 진행자를 계속 맡고 있는 이유에 대해 그들의 공감능력 덕분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사소한 역할부터 해봤던 경험과 꾸준한 노력을 통해 나이나 직업이 다양한 이들의 경험까지 아우를 수 있는 힘을 쌓았다는 것이다. 연예계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정보를 찾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정보를 내재화하는 건 아무나 하지 못한다. 정보화 시대에도 다른 세대의 경험에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은 훌륭한 경쟁력이 된다.
정승훈 디지털뉴스센터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