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기독인 의병으로 강화도에서 일제에 첫 희생된 김동수 권사 형제 무덤 찾았다

입력 2022-11-15 03:03
이은용 강화기독교역사연구소장이 지난 11일 인천 강화군 길상면의 한 야산에 있는 김동수·영구 형제의 무덤을 가리키고 있다.

지난 11일 인천 강화군 길상면의 한 야산에 조성된 전원주택단지를 지나자 낙엽이 수북이 쌓인 산길이 나타났다. 이 길로 300m쯤 더 들어가자 오래전 만든 것으로 보이는 네 개의 무덤이 눈에 띄었다. 그중 산 정상에서 가까운 곳에 나란히 있는 무덤에 빛바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십자가가 새겨진 비석에는 ‘김해김공동수영구지묘(金海金公東秀永龜之墓)’라고 쓰여 있었다. 아래쪽에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요한복음 12장 24~26절 말씀이 기록돼 있었다.

1907년 8월 21일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은 의병 김동수(1862~1907) 영구(1881~1907) 형제의 무덤이었다. 묘는 이들이 세상을 떠난 직후 만들어졌지만 묘비는 1970년대 초반 영구씨의 둘째딸이 세웠다. 둘은 모두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 교인으로 형 동수씨는 이 교회 권사였다. 강화도에서 일제에 의해 처음 희생된 기독교인 의병으로 알려진 이들이다.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잃는다. 고종은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로 특사를 파견했지만 일제는 이를 빌미로 고종을 폐위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해 8월 1일 군대까지 해산시켜 버린다. 무장해제당한 군인들은 무기고를 탈취해 일제와 맞선다. 그중에서도 서울과 원주, 강화도 의병의 활약이 컸다.

강화 의병의 구심점은 잠두교회였다. 의병들은 훗날 상하이 임시정부 2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권사의 지휘 아래 일제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군대가 해산된 뒤 아흐레 되던 8월 10일 갑곶진에 매복한 의병은 강화에 상륙하는 일본군을 기습 공격해 큰 승리를 거뒀다. 이 전투에 김동수 권사와 동생 김영구, 이들의 사촌이던 김남수가 참전했다.

더리미 해안가에 있는 김동수·영구 형제와 사촌 김남수의 순국터를 알리는 비석.

일제는 친일단체였던 일진회 회원들을 앞세워 섬을 들쑤셔 가담자를 색출했다. 집으로 몸을 숨겼던 세 형제도 일진회의 밀고로 붙잡혔다. 일제는 이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위해 서울로 압송하기로 했다. 21일 이송을 시작한 일제는 이들을 갑곶나루로 데리고 가다 방향을 틀어 후미진 해안인 ‘더리미’로 끌고 갔다. 이곳에서 이들 모두를 참수했다.

당시 인천에서 사역하던 CS 데밍 선교사는 1908년 연회 보고서에 “강화에서는 권사 김동수와 다른 교인 두 명이 의병 활동 혐의로 체포돼 재판을 받으러 서울로 압송되던 중 일본인에게 살해당했다”고 썼다.

각종 사료에 이들의 공적과 일제에 의해 참수당한 사실이 기록돼 있었지만, 초지진 근처에 썼다는 묘의 위치는 110년 동안 확인되지 않았다. 많은 사료에도 불구하고 실제 묘가 확인되지 않으면서 이들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의구심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강화도 기독교 역사를 연구한 학자와 향토사학자들이 이들의 묘를 찾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번에 묘의 위치가 확인되면서 초창기 일제에 맞섰던 강화 의병에 관한 연구와 정부포상 추가 상신 등이 진행될 전망이다. 정부는 1991년 김동수 권사를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했다.

강화군 강화중앙교회 마당에 마련된 순국추모비.

무덤을 찾아갈 때 동행했던 향토사학자 이은용(강화중앙교회 장로) 강화기독교역사연구소장은 “내년 8월 이들 세 명의 활약상과 역사적 의미를 다루는 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덕주 전 감리교신학대 교수도 14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한 초창기 의병 중 강화에서 처음 희생당한 이들 형제 이야기는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첫 불씨를 지핀 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면서 “110년 동안 감춰져 있던 두 형제의 무덤이 발견된 걸 계기로 강화 기독 의병사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진행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강화=글·사진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