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책에서 스콧 솔즈는 참 다루기 힘든 목회적 경험들을 나눈다. 자살로 아들을 먼저 보낸 한 어머니가 있다. 1주기가 되던 때, 그 어머니는 담임목사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이 땅에서의 슬픔이 천국에서의 기쁨을 더 강하게 해 줄 뿐”이라는 내용과 함께 자신의 팔에 ‘테텔레스타이’라는 글이 새겨진 팔찌를 차고 다닌다고 적었다. ‘테텔레스타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신 말씀이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큰 사고를 당할 때마다 나라가 나뉘고 국민의 마음이 갈라진다. 젊은이들이 왜 그런 곳에 가서 그런 복장을 하고 사고를 당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행동으로 인해 마땅한 일을 당했으니 그렇게 마음 아파할 일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사고를 당할 때마다 원인을 규명해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사고를 당한 이의 마음이나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며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듯하다.
이런 큰일이 있을 때마다 교회도 뭔가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 우리가 하는 말을 세상이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는 의외로 간단한 답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그 일어난 일을 보면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의외로 단순하다.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아파하며 안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가 늘 부르는 찬양 중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가사가 있다.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이유도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백성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믿음은 있는데 정작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태원에서 많은 사람이 사고를 당했다. 사고를 당한 자식들을 바라보며 아파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먼저 보였으면 좋겠다.
목회자로서 엉뚱한 두려움이 가끔 찾아온다.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사고를 나도 당할 수 있는데, 내가 쉬거나 놀다가 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하지.’ ‘교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다치더라도 심방하다가, 혹은 교회 일을 하다가 다쳐야 하는데….’ 그래서 쉬는 것이 마음 편치 않을 때도 종종 있다. 하나님 마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각자 생각으로 나를 어떻게 볼지 두렵기 때문이다.
오래전 ‘밀양’이라는 영화를 가지고 설교한 적이 있다. 그때는 주인공의 자식을 죽이고서도 너무나 떳떳한 살인자의 모습만 비판했다. 자신의 죄에 대해 너무나 관대하고 죄에 대한 책임의식이 결여된 교회와 교인을 나무라면서 설교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다고 너무나 평온하게 말하는 살인자에 대해 분노하며 울부짖던 주인공(전도연)의 모습도 하나님의 마음을 빗나가기는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아직 용서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렇게 쉽게 용서하실 수 있냐고 오열하던 주인공 역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 말이다.
하나님 마음을 알면 ‘영적 분별력’이 생긴다. 쉽게 지나쳤던 일들에 민감해지고, 집착했던 것들에 대해 여유로워진다. 게리 토머스는 ‘일상영성’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이 거룩함과 분별력의 열쇠’라고 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 때 우리는 단순해진다. 그 아름다움에 눈길이 가기 때문이다. 비로소 우리 삶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하기 시작한다.
(만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