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개봉된 ‘로마의 휴일’은 인기뿐 아니라 패션 유행을 선도한 영화로도 알려져 있다. 바로 여주인공 오드리 헵번의 ‘헵번 스타일’이다. 그의 숏컷 헤어와 세련된 스카프는 2차 대전 후 풍요를 갈망한 많은 여성들이 따라한 아이템이었다. 54년 영화 ‘사브리나’에서 프랑스 명품브랜드 지방시가 헵번을 위해 선보인 ‘사브리나 팬츠’, ‘사브리나 플랫’도 공전의 히트를 쳤다.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년)에서 헵번이 입은 블랙드레스와 벨벳 장갑은 ‘헵번 스타일’의 정점을 이뤘다. 60~70년이 흘러도 여성들이 한 번쯤은 모방할 정도로 헵번 스타일의 생명력은 길다.
하지만 헵번의 진면목은 유행을 이끈 스타성이 아닌 나눔과 헌신을 베푼 마음 씀씀이에 있다. 환갑을 앞둔 1988년 유니세프 친선 대사가 된 헵번은 구호지역들을 다니며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린 어린이들의 현실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1992년 소말리아의 유니세프 급식센터를 찾았다. 여기서 영양실조로 앙상한 어린이를 안은 채 비통에 잠긴 모습이 사진에 찍혔다. 은막의 스타 때보다 세상에 더 큰 울림을 준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이후 배우, 가수 등 많은 스타들이 오지에서 봉사하고 자선활동을 벌이고 있다. 패션의 ‘헵번 스타일’에서 한 단계 도약한 ‘헵번 코스프레’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 순간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에 동행한 김건희 여사가 지난 12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는 14세 소년의 집을 찾아 아이를 안았다. 그런데 국내에서 헵번의 소말리아 사진과 흡사한 ‘코스프레’ 연출이라는 논란이 제기됐다. 두 손으로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은 비슷하게 마련인데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만인의 연인’과 ‘만인의 밉상’ 차이인가. 전에는 미국 재클린 케네디 여사를 따라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여사가 욕을 안 먹으려면 무슨 일을 할 때 과거 유명인의 행보부터 숙지해야 할 판이다. 대선 때부터 논란의 중심에 선 때문이겠으나 지금의 비판은 정도를 넘은 느낌이다. 하늘에 있는 헵번도 혀를 찰 듯하다.
고세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