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경권’.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월경(생리)을 하는 여성 모두가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생리할 권리를 뜻하는 말이다. 동시에 누구나 생리로 인해 차별당하지 않고, 관련된 정보와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모든 여성의 기본적 건강권이지만 누군가는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이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바로 시각장애인 여성들이다. 이들에게 점자는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지만 국내 유통 중인 생리용품 대부분엔 점자가 새겨져 있지 않다. 지난 수십년 동안 시각장애인 여성들은 생리용품을 혼자 사는 것도, 실제 사용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온 것이다.
지난 4일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한글 점자가 반포된 1926년 11월 4일을 기념하는 ‘점자의 날’이었다. 이런 기념일이 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시각장애인 여성에게 꼭 필요한 ‘점자 생리대’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시각장애인에게 월경권을 보장하는 것이 왜 이토록 어려운 일이 됐을까.
“시각 장애인 생리? 아예 생각도 못 해”
“생리와 관련된 영상을 라디오 프로그램 형식으로 만들었어요. 이럴 때 난감하다는 이야기를 담았는데 ‘시각장애인도 생리할 거란 생각 자체를 못 했다’는 댓글이 달렸더라고요.” 최근 서울 건국대 근처 한 카페에서 만난 시각장애인 유튜버 허우령씨는 영상을 만든 계기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실제로 허씨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엔 시각장애인의 생리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여성 시각장애인들도 비장애인들처럼 생리하고, 생리에 대한 고민을 나눈다. 시각장애가 있는 40대 직장인 A씨는 “사용해보고 좋았던 생리용품을 권하기도 하고, 생리를 불규칙적으로 할 때도 있으니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20대 여성 시각장애인 유튜버 고수빈씨는 “생리하는 여자로서의 불편함, 생리통 등에 관해 이야기한다”며 “수업 듣는데 생리 때문에 집중이 안 된다거나 그런 내용을 주로 이야기한다”고 했다.
생리용품, 고르기도 쓰기도 쉽지 않아
여느 여성들처럼 시각장애 여성에게 생리는 일상이지만 ‘시각장애’로 인해 겪는 어려움이 많다. 당장 오프라인 매장을 찾아가 혼자 생리용품을 구매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허씨는 “편의점이든 마트든 찾아가서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거 있나요’하고 물어본다”며 “남자 직원들의 경우 상대방도 어려워하는 게 느껴진다. 이게 부끄러운 일은 아닌데 한창 10대 때에는 말을 못 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생리용품의 종류는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 생리대만 해도 소형·중형·대형 같은 크기 구분부터 날개형과 일반형, 유기농 면을 쓰는 제품, 무표백 상품까지 다양하다. 여기에 질 내부에 삽입해서 사용하는 탐폰에, 소독해서 사용하는 생리컵까지 등장했다.
국민일보 인턴기자들은 3시간 넘게 서울 여의도 일대 마트와 편의점을 다니며 점자가 표기된 생리용품을 찾아봤다. 한 대형상점에는 143종의 생리대가 진열돼 있었지만, 이 중 시각장애인이 ‘읽고 고를 수 있는’ 제품은 단 1종도 없었다. 당장 제품을 구매해서 만져보고 판단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설명을 들어야 알 수 있는 시각장애인 여성들에겐 매장에서 생리대를 골라서 구입하는 일부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셈이다.
생리용품을 산 뒤, 시각장애인의 진짜 어려움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생리용품을 사용할 때마다 주변인에게 지금 들고 있는 생리대가 중형인지 대형인지, 날개가 있는지 물어보기는 어렵다. 시각장애인들은 통상 생리대를 매번 신중히 만져보면서 크기와 모양 등을 가늠하지만 실수의 연속이다.
A씨는 지난 30여년간 생리대를 사용해왔지만 여전히 날개형 생리대와 일반형 생리대 구분이 어렵다고 했다. 또 허씨는 “요즘 나온 생리컵을 써 보고는 싶지만, 생리컵은 매번 끓는 물에 소독해야 한다는 점에서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점자 생리용품, 생산 현황은
현재 국내에서 점자 생리용품을 생산하는 업체는 2곳, 허그몬과 더스킨팩토리뿐이다. 점자 표기를 위해서는 비닐 대신 종이를 사용하는 등 포장 방식에 변화를 줘야 할 뿐 아니라 관련 기계 투자 등이 추가로 필요하다. 그렇다 보니 대다수 생리용품 제조업체들은 행정, 재정상의 부담을 이유로 점자 표기를 하지 않는다.
추후 시각장애인을 위한 생리대 생산 계획을 가진 곳은 유한킴벌리다. 이 회사는 국내 생리대 시장에서 가장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11일 “포장 방식의 변화 등을 위한 관련 투자 및 현재 포장 소진까지 고려하면 상당한 비용이 발생할 터라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며 “포장재, 포장방식 변경에 따라 유통매장에서의 협업도 필요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정책적 지원도 절실하다”고 말했다.
다행스러운 건 지난해 6월 약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며 변화의 단초가 마련됐다는 점이다. 해당 법안은 의약품과 의약외품에 점자 및 음성·수어영상변환코드를 표기할 수 있도록 법제화하고, 제조업체가 변경된 제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정부가 행정적 지원을 하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문제는 생리용품이 법안에서 규정하는 의무표기 대상에서 빠져 있다는 점이다. 법안은 타이레놀 등 편의점에서 구매 가능한 ‘안전상비의약품’은 의무표기 대상으로 규정했지만, 그 외 의약품과 의약외품의 경우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이 정하는 바에 따라 표기하도록 했다. 해당 법은 2024년 7월부터 시행될 예정이지만 식약처는 아직 생리용품을 어떻게 할지 구체적인 방침을 밝히지 않고 있다.
식약처 관계자는 “내부 논의 중이며 내년 중 행정예고가 나오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생리혈 위생처리 제품도 점자 의무표기 대상에 포함하는 법안을 추진해온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생리대는 여성의 건강과 직결되는 생활필수품이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기본적인 정보 제공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며 “식약처장이 정하는 의약외품의 범위에 생리대가 포함돼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은초 류동환 박성영 서지영 이지민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