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당일 경찰과 용산구청 등의 대응이 미흡했던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민사상 국가 배상 책임이 인정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경찰·지방자치단체의 부실한 조치가 이번 참사를 키운 ‘현저한 잘못’으로 판단될 경우 국가도 배상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7일 “이태원 참사의 경우 다수의 유사한 신고가 들어갔는데도 경찰이 제때 조치를 하지 않았던 점이 명확히 입증된다면 국가 배상이 가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참사 발생 4시간 전부터 ‘압사 위험’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112신고가 접수되는 등 위험이 예견된 상태였다고 본다면 경찰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행위(부작위)가 국가 배상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대법원 또한 판례에서 공무원의 부작위 관련 국가 배상 책임을 밝혔다. 지난 7월 대법원은 중곡동 살인사건 피해자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국가 책임을 일부 인정했다. 당시 대법원은 “국민의 생명 등에 관해 중대한 위험 상태가 발생할 우려가 있어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보호할 수 없는 경우 형식적 법령에 근거가 없더라도 국가나 관련 공무원에 대해 그런 위험을 배제할 작위를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2012년 오원춘 사건에서 보인 대법원 태도 역시 유사하다. 유족들은 경찰 초동 대응에 문제가 있었다며 국가 대상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파기환송심을 거쳐 일부 승소했다. 2심에서는 경찰의 늦장 대처와 피해자 사망 사이 인과관계가 없다며 정신적 위자료만 인정했지만, 대법원은 국가 배상 책임 범위를 넓게 봤다.
지자체 책임이 인정된 사례도 있다. 2011년 서울 우면산 산사태 사고 사망자 유족이 서초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도 대법원은 유족 손을 들어줬다. 제때 산사태 주의보를 발령하는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주민들을 대피시키지 못한 과실이 인정된다는 취지였다.
국가 배상 책임을 다투기 위해선 경찰과 지자체의 사고 전후 대응이 보다 명확히 드러나야 한다고 법조계 인사들은 지적한다. 첫 112신고 이후 참사까지 경찰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경찰 지휘라인 보고가 제때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구청에서 이번 참사를 예견했는지 등이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한다는 의미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형법은 엄격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고의나 과실을 입증하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며 공무원 형사처벌 문제와 별개로 국가 배상 책임이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