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50조원 규모의 채권시장 안정화 대책을 내놨지만 ‘돈맥 경화’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자금 조달에 비상이 걸린 재계는 안 팔리는 회사채 대신 기업어음(CP)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CP를 중심으로 한 단기물 시장이 시중 자금을 빨아들이면서 시중금리 상승세는 더 가팔라질 전망이다.
7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이날 오전 A1등급 91일물 CP 금리는 전 거래일 대비 0.04% 포인트 오른 연 4.92%를 기록했다. 2009년 1월 15일(5%) 이후 13년10개월 만의 최고치다. 정부가 시장 안정화 대책을 내놓은 다음 날인 지난달 24일(4.37%)과 비교하면 CP 금리는 0.55% 포인트 올랐다.
가파른 금리 상승세는 기업들이 CP시장으로 몰린 결과다. CP는 수요예측을 하지 않아도 돼 발행 절차가 비교적 간소하다. 재계 2위 SK그룹의 지주사 SK㈜가 3·5년물 CP 발행에 착수했다. 회사채 시장의 큰손으로 꼽히는 SK그룹이 장기 CP를 발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주에는 SK네트웍스가 44일물 CP 1000억원어치를, 롯데건설이 6개월물 490억원어치를 각각 발행했다.
채권시장안정펀드가 가동됐지만 회사채 시장은 여전히 개점휴업 상태다. 한국전력공사는 레고랜드 사태 이후인 지난달 17~26일 네 차례에 걸쳐 1조2000억원어치의 한전채 발행 수요예측을 단행했지만 주문액은 2800억원 모자란 9200억원에 그쳤다.
한전채는 정부가 신용을 보강해 최고 신용등급(AAA)이 매겨지는 데다 금리도 높아 최근 3년간 유찰된 사례가 없었다. 같은 등급인 한국가스공사와 한국수력원자력, AA+등급인 인천도시공사도 같은 달 수요를 채우지 못해 회사채를 발행하지 못했다.
문제는 단기물 시장으로의 자금 이동이 시중금리를 끌어올린다는 점이다. 금융 불안정 탓에 가뜩이나 자금시장 전반이 경색돼 있는 상황인데 단기물 시장이 시중 자금을 빨아들이면 그만큼 중·장기물 수요는 줄어든다. 이 경우 은행권이 만기가 긴 금융채 등 중·장기물로 조달하는 자금의 비용이 늘어나고 그만큼 시중금리가 따라 오르게 된다.
김영준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원은 “지금은 시중 유동성이 씨가 마른 상태라 단기물 금리 상승은 중·장기물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면서 “일반 금융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주택담보·신용대출 등) 금리까지 전반적으로 오르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욱 기자 real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