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관한 LG아트센터 서울의 블랙박스 극장 U+ 스테이지에는 컨테이너 3개가 놓여 있다. 이들 컨테이너에서는 지난달 22일부터 영국 이머시브 씨어터 그룹 다크필드의 3부작 ‘코마’ ‘고스트쉽’ ‘플라이트’가 공연되고 있다.
‘코마’는 침대로 가득 찬 병실, ‘고스트쉽’은 긴 테이블과 의자들로 채워진 회의실, ‘플라이트’는 비행기 내부의 모습이다. 이들 공간이 암흑 상태가 된 후 관객은 헤드폰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는 가운데 어느새 초현실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360도로 펼쳐지는 입체음향과 감각을 자극하는 특수효과를 통해 관객은 점차 다른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코마’에서는 관객이 코마 상태에 빠지는 듯한 경험을 하며, ‘고스트쉽’에선 영혼과 대화하는 모임을 체험하고 ‘플라이트’에선 비행기를 타고 알 수 없는 세계로 가는 과정을 경험한다. 1개의 컨테이너마다 최대 30명의 관객이 동시 참여할 수 있으며, 공연별 러닝 타임은 약 30분이다. 3편은 각각 독립된 공연으로 관객들은 원하는 공연을 선택하여 예매할 수 있다.
다크필드는 극작가 겸 소설가 글렌 니스와 음향디자이너 데이비드 로젠버그가 2016년 관객들에게 몰입형 체험극을 선보이기 위해 결성했다. 인간의 감각 기관 가운데 70~80%의 비중을 차지하는 시각을 차단한 뒤 청각 등 다른 감각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국내에서도 LG아트센터 서울의 공연에 앞서 우란문화재단이 2020년 ‘더블’을 시작으로 ‘이터널’ ‘플라이트’ 등 다크필드의 작품을 선보여 주목받은 바 있다.
올 들어 다크필드 3부작 외에 ‘이머시브’ 타이틀을 내건 공연이 잇따라 등장했다. 현재 서울에서 공연 중인 작품들만 꼽아도 여러 개다. 서울예술단이 2018년 초연 이후 4년 만에 다시 국립정동극장에서 무대에 올린 ‘금란방’은 강력한 금주령이 시행된 18세기 조선 영조 시대에 있었을 법한 밀주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유쾌한 소동극으로 관객은 밀주방에 찾아온 손님이 된다. 또 ‘그랜드 엑스페디션’은 관객이 열기구에 탑승해 세계 다양한 도시를 방문해 그 나라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콘셉트다. 이외에 소방관과 그들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한양레퍼토리씨어터의 ‘버닝필드’도 관객에게 무전기 등을 활용해 화재현장의 긴박함과 참혹함을 직접 느끼도록 만든다.
이머시브 연극(공연)은 2000년대 런던에서 시작해 이후 뉴욕을 중심으로 주목받고 있는 체험형 공연을 일컫는다. 전통적인 연극은 극장에서 관객이 객석에 앉아 무대 위 배우들의 퍼포먼스를 수동적으로 감상하지만 이머시브 연극은 다양한 공간에서 관객이 극 안에 들어와 스스로 행동하고 배우들과 같은 공간에서 움직이며 이야기 일부로 참여하는 형식이다.
‘이머시브(immersive)’는 ‘몰두하다’ ‘몰입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로 이머시브 연극을 ‘몰입극’ ‘실감극’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자칫 의미 전달에 혼란에 초래할 수 있어서 국내에선 영어 그대로 사용한다. 이머시브 연극을 위해 연출가와 프로듀서는 특정 장소에서 고유의 특성을 살리거나 오디오나 VR 등의 기술 매체를 활용해 관객의 감각을 일깨워 몰입감을 높이도록 설계한다.
다크필드 예술감독인 글렌 니스도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암흑’을 콘셉트로 다양한 감각에 어필하는 공연을 만들게 된 것에 대해 “완전 암전과 360도 입체음향은 관객 개개인의 귀에 동시에 속삭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했다”면서 “다크필드는 ‘이야기’에서 작품을 시작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의 배치 등 작품의 디자인적 아이디어에서 시작해서 역순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구상한다”고 밝혔다. 이어 “소리를 보강하기 위한 특수효과 등 작품의 모든 요소는 오직 관객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고려해서 집어넣는다”고 덧붙였다.
이머시브 연극은 1960년대 유행한 해프닝이나 환경연극, 그 뒤를 이은 퍼포먼스와 피지컬 씨어터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이머시브 연극은 2000년 펠릭스 배럿이 런던에서 설립된 극단 ‘펀치 드렁크’가 선구적 역할을 했다. 첫 작품인 ‘보이체크’는 폐허가 된 막사 안에서 관객들에게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작품을 체험하도록 했다. 이후 펀치 드렁크가 전통적인 연극형식을 뒤집는 연출로 ‘벚꽃동산’ ‘파우스트’ 등을 잇따라 선보이면서 이머시브 연극이라는 명칭이 활발하게 쓰이게 됐다.
특히 펀치 드렁크의 ‘슬립 노 모어’는 이머시브 연극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토대로 한 ‘슬립 노 모어’는 관객이 마치 맥베스의 성에서 벌어지는 왕 살해 등 여러 사건에 직접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만든다. 2003년 런던 초연을 거쳐 2009년 뉴욕에서 선보여 큰 반향을 일으킨 ‘슬립 노 모어’는 2011년 뉴욕 맨해튼의 문 닫은 호텔 맥키트릭 호텔을 전용극장으로 삼아 상설 공연에 들어갔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1년 반 동안 문을 닫은 것을 빼면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또한, ‘슬립 노 모어’는 2016년 중국에 라이선스가 팔려 상하이에서도 상설공연 중이다.
‘슬립 노 모어’의 센세이셔널한 성공 이후 구미에서 이머시브 시어터를 표방한 공연이 증가했다. 한국에서도 2010년대 들어 이머시브 연극이라고 할 수 있는 해외 공연들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가 2011년과 2012년 각각 소개한 ‘작은 금속 물체’와 ‘거리에서’가 대표적이다. 이어 국내 창작자들의 관객참여형 공연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2013), ‘내일도 공연할 수 있을까?’이 등장했다. 2016년 관객이 헤드폰을 쓰고 대학로 곳곳을 걸으며 장소에 담긴 이야기를 체험하는 ‘로드씨어터 대학로’는 이머시브 공연이라고 처음 명시한 사례다. 이후 ‘메모리얼: 조용한 식사’(2016년), ‘꾿빠이 이상’(2017년), ‘행화탕 장례탕’(2019년) 등이 이머시브 공연을 표방하고 나섰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 롱런하던 이머시브 연극 ‘위대한 개츠비’가 2019년 12월 한국 버전으로 선보이면서 국내에서도 이머시브 연극 붐이 폭발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2020년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위대한 개츠비’가 2월 조기중단 되는 등 이머시브 연극은 ‘거리두기’ 적용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하지만 올 들어 코로나19가 엔데믹으로 전환하자 대거 관객을 찾아오고 있다. 너도나도 ‘이머시브’를 표방할 정도다.
엄현희 연극평론가는 “이머시브 씨어터는 관객의 능동성, 주체성이 핵심인 예술 장르다. 보다 직접적인 접촉과 다양한 자극을 원하는 MZ세대의 성향에 잘 맞는다”면서 “특히 이머시브 시어터는 새로운 관객들이 공연예술에 흥미를 갖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