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세종 5년(1423년) 4월 25일 기록이다. 당시 가뭄이 조선을 덮쳤다. 세종이 가뭄을 걱정하면서 신하들에게 말한다.
“내 들으니, ‘임금이 덕이 없고, 정사가 고르지 못하면, 하늘이 재앙을 보여 잘 다스리지 못함을 경계한다’ 하는데, 내가 변변하지 못한 몸으로 신민(臣民)의 위에 있으면서 밝음을 비추어 주지 못하여… 수재와 한재(旱災·가뭄 피해)로 흉년이 해마다 그치지 아니하여, 백성들은 근심과 고통으로 호구(戶口·식구)가 유리(流離·떠돌아다님)되고, 창고도 텅 비어서 구제할 수 없다… 조용히 허물된 까닭을 살펴보니, 죄는 실로 나에게 있다.”
가뭄이 어떻게 임금의 잘못이겠는가. 그러나 세종은 달랐다. 위정자(爲政者)의 자세란 그런 것이다. 599년 전의 일이다.
지난 주말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30일 대국민담화에서 밝혔던 것처럼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과 참사”가 빚어진 것이다.
정치는 교통사고 보험 처리와 다르다. ‘가해차량 7, 피해차량 3’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잘못한 만큼만 사과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사과는 피해자나 사건 당사자가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만류할 때 완성된다.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는 처신도 이런 것이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세월호 참사가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4월 29일 세월호 참사에 대해 사과했다. 같은 달 16일 세월호가 침몰했으니, 참사 발생 13일 뒤에야 박 대통령은 ‘죄송’이라는 말을 꺼냈다. 박 대통령은 ‘여기서 밀리면 끝’이라는 정치적 위기감에 사과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버티다가 더 밀렸다. ‘박근혜 탄핵’은 ‘최순실 국정농단’이 결정타였지만 세월호 참사로 이미 배에 구멍이 난 상태였다.
사과의 진정성도 문제였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원인을 “과거로부터 쌓여온 적폐”의 탓으로 돌렸다. 검경 수사를 받던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숨진 채 발견됐지만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용산 대통령실의 보도자료를 종합하면, 윤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29일 밤부터 30일 새벽 분주하게 움직였다. 윤 대통령은 29일 오후 11시21분 첫 지시를 내린 이후 30일 0시42분 용산 대통령실에서 긴급상황점검회의를 열었다. 이어 오전 2시44분 정부서울청사에서 회의를 주재했다. 이후 오전 9시45분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윤 대통령은 또 31일부터 2일까지 사흘 연속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1일 저녁엔 경기 부천과 서울에 마련된 빈소 두 곳을 직접 찾아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하지만 아쉬움은 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문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2일 이 장관의 경질 요구와 관련해 “정무적 책임 또한 사실관계를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애도의 시간’에서는 위정자가 사과와 희생을 아껴서는 안 된다. 국민은 윤석열정부가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이 장관 거취 결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것이 민심의 분노가 산불로 번지는 것을 막는 길이며, 또 이태원 참사를 음모론에서 구하는 길이다. 물러서야 사는 상황이다.
위 대목에 있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날 이어지는 글이다. 세종은 이렇게 말한다. “대소 신료(大小臣僚·크고 작은 관직의 모든 관료)들은… 백성들의 이롭고 병 되는 것을 거리낌 없이 마음껏 직언하여 나의,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지극한 생각에 부응되게 하라”고 당부했다. 세종이 지금 윤석열정부에 던지는 조언 같다.
하윤해 정치부장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