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오전 11시42분 경기도 고양 서울시립승화원 중앙 출입문 앞에 ‘이태원 참사’ 20대 사망자 A씨의 관이 운구차에서 내려섰다. 영정 속의 앳된 A씨는 밝게 웃고 있었다. 관을 바라보는 유족들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화구로 향하는 관 뒤로 눈물의 행렬이 뒤따랐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비탄의 목소리도 들렸다.
이날부터 이태원 참사 사망자들의 발인이 시작됐다. 서울시립승화원, 서울 서초구 서울추모공원 등 전국 각지의 화장터에서 유족과 피해자의 마지막 인사가 이뤄졌다. 승화원으로 시신이 하나둘 들어설 때마다 화장장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태원 유족들의 유독 서글픈 울음소리에 다른 유족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봤다.
A씨 유족과 친구들은 관이 이동하는 내내 흐느꼈다. 모친은 휘청거리며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관이 화장대에 오르자 통곡 소리는 더 높아졌다. “내가 잘못했어…” “너 없이 어떻게 살아, 내가 어떻게 살아” 등의 울음으로 뭉개진 말소리가 바깥까지 들려왔다.
화구가 닫히고 다리 기력이 완전히 바닥난 A씨 모친은 장례지도사들의 부축을 받아 어렵게 계단을 올라 2층 유족 대기실로 들어갔다. 대기실 안에서 유족들은 침묵했다.
낮 12시48분 20대 희생자 B씨의 관이 승화원에 들어섰다. “○○아, 어떻게 해 내 새끼….” 유족 중 나이 든 여성이 오열했다. 관이 화구와 가까워지자 주위의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한 유족은 B씨 영정을 가슴 한가운데에 품고 발을 동동 굴렀다. 올해 초 원하던 직장 시험에 합격해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 유족들의 비통함은 더했다.
외할아버지에게 B씨는 딸보다 가까운 손녀였다. B씨는 고등학교 근처인 외가에서 살며 학교를 다녔고, 이번 참사 직전까지도 독립해 외가 근처에서 살며 할아버지와 돈독하게 지냈다. 발인 전 장례식장에서 국민일보와 만난 B씨 외할아버지는 “친자식 같은 아이였다”며 “항상 열심히 공부하던 자랑스러운 손녀였다”고 회상했다.
유족은 참사 후 서울 노원구의 한 요양병원에 안치돼 있던 시신을 서울 중심부의 대형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겼다. 어린 B씨를 요양병원의 노인들 틈에 놔두는 게 편치 않았다고 했다. B씨 유족은 승화원에서 만난 기자에게 “그저 참담할 뿐”이라며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다”고 했다.
서울추모공원에서도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발인이 진행됐다. 오전 9시45분 프로야구단 치어리더로 활동했던 20대 희생자 C씨 운구차량을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유족들은 차에서 관을 내리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관이 고별실 안으로 들어서자 유족은 고인을 보낼 수 없다는 듯 관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화로 앞에 선 유족들은 쓰러지지 않으려 서로에 기대 간신히 서 있는 모습이었다.
러시아·중국·일본·이란 등 26명 외국인 희생자들의 경우 외교부가 해당 국가 대사관과 협의를 거쳐 시신을 본국으로 인도할 계획이다.
고양=이형민 기자, 성윤수 이의재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