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 살아남아…” 생존자들 트라우마 호소

입력 2022-11-01 04:05
한 조문객이 31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 이태원 참사 합동분향소 앞에서 조문하던 도중 안경을 벗고 눈물을 훔치고 있다. 합동분향소는 서울광장을 비롯해 서울 25개 자치구에 설치됐다. 합동분향소 운영시간 및 장소는 각 구청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울을 제외한 16개 시·도 역시 청사와 광장 등에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정부가 정한 국가애도기간인 5일까지 운영된다. 김지훈 기자

“죄송합니다.” 30일 경기도 의정부을지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한 20대 여성은 머리를 숙인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여성은 전날 핼러윈데이를 앞두고 친구와 함께 이태원을 찾았다. 사고 당시 친구와 손을 잡고 겨우 버텼지만 인파의 압력에 결국 친구 손을 놓쳤다. 이 여성은 친구의 사고 소식을 친구 가족에게 전했고, 친구의 죽음을 장례식장에서 확인했다. 그는 자신이 끝까지 손을 잡고 있지 못해 친구가 사망했다는 죄책감에 친구의 부모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가족과 친구, 동료를 잃은 슬픔에 더해 ‘나만 살아남았다’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압사 사고 현장에서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던 지인들과 뒤엉킨 채 머물러야 했던 이들은 계속 떠오르는 사고 잔상에 힘겨워한다.

참사 현장 한가운데 있었던 김모(18)군도 불쑥불쑥 사람들 속에 끼어 있던 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는 나홀로 빠져나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들뜬 마음으로 축제 현장을 방문했다는 기쁨은 채 3시간도 지나지 않아 평생의 악몽으로 변했다. 꽉찬 인파 속에 이리저리 떠밀리는 상황이 30분간 이어지더니 참사가 발생한 골목 위쪽에 있던 그의 눈앞에서 10명가량이 균형을 잃고 우수수 넘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사방으로 조여오는 무게에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의 얼굴도 퍼렇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때 담벼락 위에서 누군가가 “잡고 올라오세요”라고 소리쳤고 김씨는 그 손을 잡고 인파 속을 빠져나왔다. 김씨는 “사망자들이 많은데, 나만 살아나온 것처럼 느껴진다. 그분들한테 죄책감이 들고 죄송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참사 현장에서 심폐소생술(CPR)에 참여했던 시민들도 ‘살려내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태원 부근에 사는 문모(29)씨는 참사 당일 오후 11시가 넘어 이태원 사고 현장을 찾았다. 이미 거리에는 축 늘어진 사람들이 군데군데 누워 있었고, 모포로 덮인 사망자들도 여럿 보였다. 문씨는 군대에서 배운 CPR을 시도했다.

그가 약 30분간 등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CPR을 시도한 남성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가망이 없다”는 구급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씨는 이 남성을 모포로 덮은 뒤 터덜터덜 구급대원과 함께 운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를 떠올리면 무섭다는 생각보다 무력감이 더 크다고 했다. 그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고 전했다. 문씨는 참사를 애써 잊으려고 애쓰는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31일 이태원역 앞에 도열된 조화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그때의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문씨는 “아직 무력감이 남아 있지만 출근도 하고 일상을 찾아야 하니 최대한 회복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서울광장 분향소 인근에 설치된 ‘심리지원 상담소’에는 압사 현장에 있던 생존자들의 방문도 이어졌다. 한 20대 남성도 이곳을 찾아 40여분 동안 상담을 받았다. 그는 “사고 발생 골목에서 나는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당시 생사를 오가던 사람들의 절망스럼 표정이 계속 떠올라 상담을 받게 됐다”고 했다. 그날 이후 원인 모를 복통이 생겼다는 그는 이날 그림과 장난감 등을 이용한 심리치료 상담을 받았다.

<‘이태원 참사’로 불안, 우울 등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는 분들은 정신건강위기상담전화(1577-0199)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윤수 이의재 기자 tigri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