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올해 예산은 8312억원이다. 정부는 국회에 예산안을 제출할 때 국정원법에 따라 총액만 공개한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특수활동비는 국회 정보위원회가 심사할 뿐 밝히지 않는다. 한 시민단체는 얼마 전 정부 부처 예비비를 모두 분석해 “문재인정부 5년 동안 국정원은 매년 6500억원 정도를 비공식 예산으로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어디는 물론이고 얼마를 썼는지도 파악하기 힘든 구조인 것이다. 예산만 그런 게 아니다. 과거 한 국회의원이 국정원장 인사청문회에서 국정원 직원수를 언급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만큼 국정원은 모든 게 철저하게 비밀이다.
그런 국정원에서 예산과 인사를 총괄하는 사람이 기획조정실장이다. 서열은 국정원장, 1·2·3 차장 다음이지만 국정원 2인자로 불린다. 중앙정보부가 생긴 1961년 이래 기획조정관, 운영차장, 분석연구실장 등으로 이름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역할은 그대로다. 게다가 역대 정권은 대통령이 흔적 없이 쓸 돈을 마련하는 창구로 국정원을 활용했는데, 그 금고지기 역할을 기조실장이 했다.
김영삼정부 시절 김기섭 운영차장은 국정원 예산 1157억원을 선거자금으로 김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에게 제공했고, 김대중정부에서도 최규백 기조실장이 대북송금 사건에 개입했다. 박근혜정부 이헌수 기조실장은 특활비 청와대 상납 사건으로 국정원장 3명과 재판을 받았다. 이후 특활비 상납 관행은 사라졌지만 기조실장이 정권과 국정원을 이어주는 통로라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그렇기에 역대 대통령은 측근 중 측근을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보냈다. 조직을 장악해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흐트러짐 없이 추진토록 하는 게 기조실장의 중요한 임무인 것이다.
최근 조상준 기조실장 자진 사퇴가 정치권의 가장 큰 화제다. 1·2급 물갈이 인사 과정에서 김규현 국정원장과의 갈등설이 나왔는데 대통령실과 국정원이 부인하니 속사정을 알 길이 없다. 다만 국정원이 또다시 정권의 시녀로 전락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고승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