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여성 노동… 화이트큐브에 담기엔 너무 슬픈 서사

입력 2022-10-27 04:06
2022 부산비엔날레 메인 전시장인 부산 사하구 부산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설치돼 있다. 남루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흑백으로 그린 부산 작가 감민경의 드로잉 작품이 주는 정서가 화이트큐브 벽면에 스며들지 못하고 있다.

지난 9월 3일 개막한 2022 부산비엔날레가 11월 6일 종료를 앞두고 막바지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 2년 전 비엔날레에서 외국인 감독을 뽑았던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는 이번에는 한국 여성 큐레이터, 그것도 갓 40대 김해주(41) 아트선재센터 부관장을 전격 발탁해 기대를 모았다.

전시 주제는 ‘물결 위 우리’다. 김 감독은 “물결은 부산으로 유입되고 밀려났던 사람들, 요동치는 역사에 대한 표현이자, 세계와의 상호 연결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을숙도부산현대미술관, 근대화의 역사를 간직한 부산항 1부두와 초량, 영도 등 4곳을 전시장소로 선택했다.

대체로 무난하다. 이주, 산업화와 여성, 도시 생태계, 기술변화까지 폭넓게 다룬다. 특히 이주와 여성, 기후 위기는 국제 비엔날레 무대에서 익히 봐왔던 시대적 관심사다. 물량 공세를 하기 보다 참여 작가수를 국내외 64명(팀)으로 한정함으로써 관람 피로감을 줄인 점도 좋았다.

하지만 무난하다는 게 최선은 아니다. 한 방향의 물결을 만들어 내기에는 이주에서 기술변화까지 주제가 폭넓다. 부산을 매개로 생각할 수 있는 시대적 이슈를 다 모은 느낌이다.

저렴한 산업 재료를 사용한 필리도 발로의 설치 작품.

또 한국의 비엔날레가 역사를 거듭함에 따라 이제는 뭘 보여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시점도 됐다. 그런 면에서 메인 장소인 부산현대미술관의 화이트큐브 전시는 내용과 디스플레이가 엇박자였다. 디아스포라와 여성 노동, 환경 파괴 등 주제가 내거는 곡조는 투박하고 거칠며 때로는 슬프기도 해 벽이 깨끗한 흰색이고 바닥이 비칠 정도로 반들반들한 전시장에 잘 스며들지 못했다. 특히 설치 미술은 그 공간과 어색한 동거를 하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철근 콘크리트, 각목, 합판 등 거칠고 저렴한 재료를 사용해 만든 영국 작가 필리도 발로(78)의 거대한 설치 작품 등이 그랬다. 콘텐츠에 어울리는 디스플레이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부산항 1부두 전시장 외관 모습.

부산항 1부두와 영도, 초량 등은 부산이라는 도시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갖는 이주의 산업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선택지였다. “부산항 1부두는 부산을 외부세계와 연결하는 관문이자 이주의 통로였고, 근대 도시 부산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 1세대와 그 후손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파친코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종 선택된 장소인 부산항 1부두 내 4000㎡(1200평) 옛 창고 건물은 7명 작가의 작품으로만 채우기에는 너무 넓고 층고도 너무 높았다. 아무리 큰 작품을 갖다놔도 전시장이 휑해 관람의 집중도를 떨어뜨렸다. 강홍구 사진작가는 “공간이 작품에 비해 너무 셌다”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영도에서는 동삼동의 한 폐공장이 동원됐는데, 마찬가지로 전시 장소로는 너무 컸다. 영도는 “6·25전쟁 당시 피란민의 애환이 깃든 섬이자 피란민과 실향민의 집이자 깡깡이(배의 녹, 따개비 등을 제거하는 일) 아지매들과 출항 해녀의 일터”이다. 그런데 한때 조선소로 쓰인 폐공장은 지금 지붕도 남아 있지 않는데, 이곳에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초청된 이미래(34) 작가의 작품이 어마어마한 높이로 설치됐다. 작가는 거대한 비계를 만들어 폐기름을 묻힌 공사장 가림막 천을 “폐공장에 삼켜진 생물체의 흔적”처럼 내걸었다. 이곳에는 사모아계 뉴질랜드 작가인 이디스 아미투나이(42)의 사진 작품들이 함께 전시 됐다. 실내에서라면 큰 사이즈이지만 하늘을 지붕 삼는 야외인데다 이미래의 스펙터클한 작품 옆에서는 왜소했다. 이 역시 작품에 적절한 공간 크기는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부산항 1부두 전시장 실내 전시 전경.

2020 부산비엔날레에서 덴마크 출신 야콥 파브리시우스도 똑같이 피난지로서의 부산의 역사를 다뤘다. 그때도 원도심을 전시 장소로 택했지만 골목골목 걸으며 과거를 체험하게 했다면 이번에는 거대한 장소 하나만을 제시해 그런 재미는 없다. 전시장 주변에선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점도 불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꼼꼼한 리서치를 통해 주제에 어울리는 작가를 잘 발굴한 점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들의 작품을 하나하나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흙과 식물, 곤충으로 직접 만든 안료로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 희생자 지도를 그린 미국의 샌디 곤드리게스(47), 전쟁고아 출신으로 그 시절 풍경을 아마추어답게 정직하게 그린 오우암(84), 장애동생의 치유를 위해 신앙에 기댄 어머니를 주제로 한 부산 청년 작가 문지영(39)의 회화, 튤립 압화를 활용해 인네도시아 전통 무늬를 그리는 네덜란드 작가 제니퍼 티(49) 등의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친절한 설명도 좋았다.

부산=글·사진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