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경제난이 바꾸는 정치

입력 2022-10-27 04:08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를 꼽으라면 오리건주 포틀랜드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최저임금이 미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고 친환경 정책도 다른 주에 앞서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가장 거셌던 곳도 포틀랜드다. 애플 설립자 스티브 잡스가 인생의 자양분이 된 히피 문화에 심취했던 리드 대학도 포틀랜드에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오리건주의 역대 주지사는 ‘당연히’ 민주당 출신이었다. 마지막 공화당 주지사는 1979년부터 87년까지 역임한 빅토르 아티예였는데, 시리아 이민 가정 출신인 그는 미국의 첫 중동계 주지사였다. 그의 당선도 이 지역의 공존을 지향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35년간 민주당이 수성한 이곳에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다. 다음 달 8일 미 중간선거의 일환으로 치러지는 주지사 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여러 여론조사 결과 공화당 출신이 주지사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현지 지역 언론에 따르면 최근 조사에서 공화당 후보인 크리스틴 드라잔은 37%를, 민주당 후보인 티나 코텍은 35%를, 무소속 후보인 벳시 존슨은 17%를 얻었다.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공화·민주 두 후보는 미세한 차이로 1, 2위를 달리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5일 오리건주를 방문해 민주당 후보를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그가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달러 강세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한 곳이 포틀랜드다.

공화당 후보가 이례적인 선전을 하는 배경에는 노숙자 문제가 있다. 미국 여느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포틀랜드도 치솟는 임대료로 노숙인이 급증하고 있다. 집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도심 등지에서 텐트를 치고 산다. 포틀랜드 시민들은 처음에는 연민 어린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봤다고 한다. 하지만 불어난 텐트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보도를 막기 시작하고 길에 쓰레기가 넘쳐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텐트촌에서 발견된, 마약 투약의 흔적인 수많은 주사기도 연민의 감정을 불신으로 바꿨다. 시민들은 노숙인 문제가 사회 문제가 됐다고 생각하고 주 정부와 시 정부에 대책을 요구했다. 민주당이 이끄는 지방 정부가 문제 해결에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자 공화당 후보가 이 지점을 공략했다.

포틀랜드에서 벌어지는 일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다르지 않다. 물가 상승과 에너지 부족으로 생활고가 계속되면서 빈곤층, 난민에 대한 배타적 태도가 강해지고 있다. 이는 정치적으로 극우 세력의 득세로 이어진다. ‘여자 무솔리니’로 불리는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이런 환경을 이용해 권력을 잡았다.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로 이어지는 해상을 봉쇄해 난민의 유입을 막자는 주장으로 유권자 마음을 얻었다. ‘차별 없는 복지국가’로 여겨지는 스웨덴도 마찬가지다. 백인 우월주의와 반이민을 기치로 내건 극우 정당 스웨덴민주당이 최근 총선에서 20%가 넘는 득표로 원내 제2당이 됐다. 스웨덴 새 연립정부는 최근 페미니스트 외교 정책을 사실상 폐기하는 수순에 돌입했는데, 스웨덴민주당의 협조를 얻기 위한 것이란 의견이 많다.

경제난이 정치 지형을 바꾸는 일은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 에너지 위기와 물가 상승이 단시간 내 해소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경기 침체는 이제 시작이며 10년간 지속할 것이라는 경고도 나온다. 경제적 고통에 지친 사람들이 늘면서 정치인들은 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미움’을 이용할 것이다. 정치가 키운 미움은 혐오가 돼 곳곳에서 분열과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경기 침체의 시대, 경제난보다 더 걱정해야 하는 건 분쟁과 또 다른 전쟁일지도 모른다.

권기석 국제부장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