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There is no path to peace. Peace is the path).”
마하트마 간디의 이 간결한 말은 인간의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분열과 대립, 갈등과 투쟁, 파괴와 절멸로 점철된 기나긴 인류의 연대기에서 평화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소망이었으며 영원한 미션이다. 그러나 평화는 전략과 전술도 아니고 최종적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동기이자 전제이며, 도구이자 나아가 과정 그 자체여야 한다. 간디는 또 유명한 말을 남긴다.
“비폭력은 인류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비폭력은 그저 폭력을 동원하지 않는 상태, 혹은 현실적인 저항을 거세한 무기력한 굴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총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이성적 설득과 감성적 공감, 높은 깨달음을 공유하는 영성적 노력을 포괄한다. 인류는 전쟁의 기술을 진화시켰지만 동시에 ‘문화’라고 부르게 되는 다양하고 입체적인 비폭력적 장치들을 확대시켜왔다. 물론 문화가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문화는 나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내 삶과 연결시키고자 노력하고, 다름과 틀림의 차이를 이해하게 하며, 나아가 자신과 타자의 존엄에 대한 경의를 가지게 함으로써 대결보다는 공존의 지혜를 탐구하게 만든다.
올해 2022년은 남북이 분단 이후 통일과 관련해 최초로 합의한 이른바 7·4 공동성명을 발표한 지 꼭 50년이 되는 해다. 반세기에 해당하는 이 기나긴 시간의 남북관계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롤러코스팅 그 자체였고,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남북관계 50년은 한 편의 시시포스 신화를 보는 것 같다. 우리가 지난 50년간의 시도와 좌절의 역사를 보면서 얻는 하나의 교훈은 남북한 평화 정착에 있어 원샷의 정치적 해결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언은 선언일 뿐이다. 국가의 정상들에 의한 선언만으로는 실질적인 협정에 이를 수 없다. 양국 시민 간 상호 이해와 존중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서명서는 순식간에 휴지로 전락할 수 있다. 우리는 힘들게 구축한 개성공단이 하루아침에 폐쇄되고 그 속의 남북연락사무소 공간이 폭파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익에 의한 협력은 또 다른 이익에 의해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의 중요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현한다. 하나의 민족에게 문화는 가장 나중에 형성되는 것이면서 또한 가장 늦게 소멸하는, 존재의 끈질긴 본질이다. 전쟁으로 국권을 상실한다고 해도 문화까지 빼앗기지 않는다. 하지만 문화까지 잃게 되면 그 민족은 자신의 정체성을 최종적으로 상실한다. 외교적·군사적 대치 국면에서 문화의 가치는 진정으로 빛난다. 문화는 두 적대 진영 간의 상호 인정을 가능케 하는 최후의 희망이다.
미·소 양 강대국 간의 기나긴 냉전 시대에도 미국과 소련은 문화 교류라는 가느다란 끈을 놓지 않았다. 냉전의 산물인 동·서독 분단기에 서독이 보인 지속적인 입장은 같은 분단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 참조할 만하다. 1969년 취임한 빌리 브란트 총리는 국가와 민족을 분리해 고찰했다. 즉 독일이 두 개의 국가로 갈라져 있더라도 민족적 동질성이 유지되는 한 하나의 민족으로 존재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아가 브란트는 ‘민족이란 의식과 의지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공통의 언어, 문화, 전통과 역사가 민족을 이룰 수 있는 기초이기는 하지만 교류와 접촉을 통해 민족적 동질성을 의식적으로 유지 혹은 강화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이해와 공감의 노력이 쌓여 벽을 넘는다. 이는 정부만의 몫이 아니다.
강헌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