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후 춘천역. 그늘진 구석에 밀어 놓아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셔틀버스 타는 곳’ 안내문을 따라 200여m 걸어가니 십여 명이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맘때 단풍놀이 손님들을 실어 나르느라 바빴을 것 같은 오래된 관광버스 한 대가 슬그머니 다가온다.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 개장한 국내 첫 글로벌 테마파크 ‘레고랜드’로 가는 버스다. 주차장으로 가는 10여분 동안 눈 앞에 펼쳐지는 건 갈아엎은 붉은 흙무덤과 임시 가림막을 엮어 놓은 광활한 중도유적지다. ‘아이들에게 물려줄 소중한 문화유산 중도유적을 파괴하는 레고랜드는 당장 떠나라! 엄마아빠 일동’이라고 써 붙여 놓은 현수막들만 스산하게 펄럭인다.
강원도 춘천시 의암호의 중도에 문을 연 레고랜드는 1968년 레고의 탄생지인 덴마크 빌룬드에 처음 개장한 이후 세계에서 10번째로 문을 연 테마파크다. 레고랜드 코리아 유치는 역대 강원도지사들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마침내 2011년 강원도와 레고 운영사 멀린 엔터테인먼트는 투자 조건 합의에 이르러 2015년 개장을 약속했지만, 조성 예정 부지의 매장문화재 발굴 조사 도중 청동기 유물이 대거 발견되고 공사비 지급에도 문제가 생기면서 사업은 장기 표류하게 된다. 그렇게 11년이 흐른 뒤인 올해에서야 개장하게 된 것이다.
중도유적의 중요성을 내세운 개발 반대와 지역 경제 활성화를 기대하는 개발 찬성 여론은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가 완공된 지금까지도 좁혀지지 못하고 있다. 예로부터 중도는 사람이 살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모여 농사짓고 마을을 이뤄 살던 중도에서 선사시대 유적이 발견된 건 벌써 40년 전 일이다.
1977년 국립중앙박물관 조사 때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중도식 토기’와 반달돌칼, 돌도끼 등이 발견돼 중도유적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고 있었지만, 매장된 문화재 규모가 이렇게 크고 중요할지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 레고랜드 유치의 화근이 됐다. 이번에 발굴된 중도유적은 시대적으로는 신석기부터 청동기, 철기까지 아우르며 우리나라 고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주거지와 무덤, 사원 등 1400여기에 이르는 청동기 문화재가 나왔다. 단일 유적으로는 한반도 최대 규모다.
당장 공사를 중지하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문화재청과 레고랜드가 내린 결정은 노출된 문화재를 흙으로 덮어 다시 땅에 묻는 ‘복토’였다. 레고랜드는 2m 복토로 아슬아슬하게 덮어둔 2000년 전 문화재 위에 쌓아올린 레고블록인 셈이다. 연간 200만명 이상 관광객 방문, 1만개 이상 일자리 창출이라는 경제적 논리도 있지만 이런 사정을 알 바 없는 아이들은 레고랜드 가는 날을 기다린다.
‘생각하는 무엇이든 만들기’라는 말처럼 레고 놀이의 핵심은 아이들이 직접 만들고 조립하는 체험이지만, 레고랜드는 아빠들의 힘겨루기 장이었다. 성인 한 명이 아이를 옆에 태우고 줄을 힘껏 당겨 올라가는 놀이기구 ‘몽키 클라임’ 앞에서 목장갑을 끼는 아빠의 눈빛이 비장하다. 다음은 ‘파이어 아카데미’. 다섯 대의 소방차가 출발선에 놓여 있다. 온 힘을 다해서 핸들을 잡고 피스톤 운동으로 차를 움직여야 한다. 1등으로 도착해 레고로 만든 건물에 붙은 연기를 진압하기 위해 물을 뿌려야 하는 미션. 늦가을 저녁 바람이 꽤 쌀쌀하건만 레고랜드를 나서는 아빠들의 머리카락은 푹 젖어 있다.
‘레고(LEGO)’라는 이름은 덴마크어로 ‘재미있게 놀다(play well)’라는 뜻을 가진 ‘leg godt(라이 커트)’에서 유래했단다. 하지만 레고랜드에서 모두가 즐겁지는 않은 것 같다. 끝나지 않은 중도유적지 보존 문제, 성인 6만원 어린이 5만원이나 하는 비싼 입장료, 운영에 미숙한 스태프, 정비가 미비한 시설 등의 문제가 산적하다. 결국 레고랜드는 강원도의 어음 채무 불이행 발표로 모두의 골칫덩어리가 돼 버렸다.
최여정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