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 사태’가 불러온 채권시장 불안이 금융위기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정부 차원의 핵심 대책 중 하나는 KDB산업은행을 통한 10조원 규모의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이다. 산은은 회사채를 사들일 실탄이 넉넉지 않은 상황이라 산업금융채권(산금채)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지금과 같이 시장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채권 투자자는 우량한 산금채에 몰릴 가능성이 크다. 회사채를 매입하기 위해 발행하는 산금채가 시중 회사채 수요를 잡아먹는 딜레마에 빠질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지난 23일 내놓은 50조원+α 규모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에서 규모가 큰 대기업 회사채와 CP 매입은 산은이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지원 기관으로 함께 거론된 IBK기업은행은 본래 목적이 중소기업 지원인 데다 증시에 상장된 공공기관이라 이번 대책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산은에 회사채와 CP를 매입할 돈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지난 6월 말 기준 산은의 당기순이익은 4700억원으로 전년 동기(2조3800억원) 대비 1조9100억원 감소했다. 이 밖에 산은은 현금과 예치금 11조8900억원, 이른 시일 내 현금화가 가능한 국공채를 4조6600억원어치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산은에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하는 재원인 데다 기업 구조조정 등 산적한 현안도 많아 다 털어 쓸 수 없다.
결국 산은은 산금채를 발행해 필요 자금 일부를 조달할 것으로 보인다. 산금채는 특별법에 따라 설립된 산은이 발행한다는 특성 덕분에 한국 정부 신용과 연동돼 AAA등급 채권 중에서도 가장 우량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처럼 채권시장이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산금채가 1순위 투자 대상인 셈이다.
채권 투자심리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산금채가 또 풀리면 그보다 신용도가 떨어지는 회사채는 투자자를 찾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지난 17일 AAA등급인 한국도로공사와 AA+등급인 JB금융지주 회사채는 각각 1000억원어치 수요를 채우지 못해 미달했다.
또 아무리 우량한 산금채라도 최근 시장 상황을 감안하면 제대로 소화될지 미지수다. 산은이 지난 20일 발행한 2년물 산금채 2500억원어치에는 연 5.43% 금리가 매겨졌다. 민평 금리 대비 0.43% 포인트 높다. 민평 금리는 민간 채권 평가사 4곳이 산정한 금리 평균으로 특정 채권 수요가 얼마나 되는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사실상 채무 불이행(디폴트) 위험이 없는 초우량채 금리가 민평 금리 대비 0.4% 포인트 이상 높다는 것은 그만큼 채권시장 수요가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상훈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24일 “산금채 발행을 통한 회사채 매입은 왼쪽 주머니에 있는 채권시장 투자금을 오른쪽으로 옮기는 것에 불과하다”면서 “한국은행이 금융사에 대출을 내줄 때 은행채 등도 담보로 잡을 수 있도록 적격담보증권 대상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진욱 기자 real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