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보이지 않는 전쟁

입력 2022-10-25 04:03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고 스칸디나비아반도 사이에 자리한 북해에는 도거뱅크라는 해역이 있다. 물속에 도거랜드라는 거대한 모래톱이 있는 곳으로 수심은 15~36m에 불과하다. 도거뱅크는 청어, 대구의 산란지로 유명한 어장이다. 스페인 식민지였던 시절, 네덜란드는 청어잡이에 주목했다. 원양어선 ‘하링바위스’가 도거뱅크에 머물면서 청어를 잡아 머리와 내장을 처리하면, ‘도거’라 불리는 어선들이 다가와 염장 청어를 싣는다. 대신 하링바위스에 생필품과 소금 등을 공급한다. 도거뱅크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네덜란드는 청어잡이를 조선·해운업으로 확장했고, 16세기에 북유럽 해운업의 70%를 장악했다. ‘암스테르담은 청어 뼈 위에 건설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유럽 전역에 염장 청어를 대면서 확보한 자본은 무역·금융 대국으로 성장하는 씨앗이 됐다.

도거뱅크는 북해의 중앙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자주 전쟁터가 됐다. 1781년 8월 5일에도 그랬다. 이날 네덜란드 해군은 영국에 완승을 거뒀다. 네덜란드 해안을 봉쇄하고 서인도 제도와 동인도 제도에서 파죽지세로 달리던 영국에 제동을 거는 듯했다. 과거 세 번의 영란전쟁처럼. 하지만 한 번뿐이었다. 이후 네덜란드는 일방적으로 밀렸고 1784년 5월에 항복했다. 길더화는 기축통화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고, 패권국 권좌는 영국에 넘어갔다.

“역사는 반복한다.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을지라도, 분명 그 ‘운율’은 반복한다”(마크 트웨인)는 말은 유효하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무역전쟁을 벌였던 것처럼 중국과 미국이 부딪히고 있다. 방식은 달라졌다. 노골적으로 총부리를 겨누는 대신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인다. 전쟁터는 무역·경제에서 기술로 빠르게 옮겨갔다. 미국은 4차 산업혁명의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 세워질 새로운 경제·산업 체제에서도 여전히 패권을 쥐려고 한다. 그게 반도체, 인공지능(AI), 바이오, 에너지, 달 탐사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기술전쟁은 무역·경제전쟁보다 훨씬 큰 타격을 상대에게 안길 수 있다. 미래의 싹을 송두리째 뭉갤 수 있어서다. 기술전쟁의 승자는 무역·경제전쟁, 군사전쟁에서도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미국은 반도체 동맹을 만들고, 자국 중심의 공급망을 구축하며, 적군과 아군을 구분한다. 전 세계는 격렬한 충돌이 빚은 소용돌이로 빨려들고 있다. 미·중 무역갈등은 ‘메이드 인 차이나’ 딱지를 붙인 값싼 물건들이 만들었던 ‘저물가 시대’의 막을 내렸다. 여기에 시장에 뿌려진 막대한 유동성이 유발한 인플레이션, 공급망 붕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기후위기에 빨라진 에너지 전환 같은 복합적이고 이질적인 불씨들이 뒤섞였다. 겪어보지 못한, 예상하지 못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전면전으로 덩치를 키운 기술전쟁은 ‘기술’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도 치명적이다. 반도체 강국이라며 어깨를 으쓱하지만, 언제 미국이 한국을 헌신짝 버리듯 할지 모른다. 미국은 반도체산업육성법을 발효하면서 이미 조짐을 보인다. 미국은 이제 동맹국 사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달콤한 당근도 없이 매몰차게 채찍만 휘두른다. 내가 먼저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세계화가 후퇴하고 국제 무역이 위축되고 있지만, 미국은 8월까지 5개월 연속으로 무역적자를 크게 개선하고 있는 게 하나의 증표다.

보이지 않는 전쟁은 무서운 속도로 전개되고 있다. 휘말린 한국이 살길은 오직 기술, 그것도 ‘초격차의 기술’ 확보다. 국민이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고,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등의 행위를 정치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정치는 처절한 현재와 어두운 미래를 보고 있을까.

김찬희 산업부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