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몰라 방황하던 돈, 은행 예·적금으로 몰린다

입력 2022-10-24 04:07

경색된 채권시장에서 빠져나간 돈을 은행권이 급격히 빨아들이고 있다. 신용도가 높은 지방자치단체마저 디폴트를 선언하는 등 위험이 커지자 위험자산인 회사채 수요가 사라지고 안전자산인 은행채와 예·적금 인기가 올라간 탓이다. 당장 영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한 중·소규모 저축은행과 건설사 등의 경영건전성에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20일 기준 5대 시중은행(KB국민·하나·우리·NH농협·신한은행)의 정기예금 잔액은 796조4514억원으로 집계됐다. 8월말(729조8206억원)에서 9월말(760조504억원)을 거쳐 이달에도 급격한 증가세다. 이달말에는 800조원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

시중 자금이 은행으로 쏠리는 것은 그만큼 시장이 기업투자를 위험하다고 인식했다는 뜻이다. 최근 건설 경기가 급격히 악화하며 152조원에 달하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일부에서 부실 위험이 감지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강원도가 2050억원 규모 ‘레고랜드 ABCP(자산유동화증권)’에 대한 지급보증을 거부하며 시장이 패닉상태에 빠졌다. 신용도가 국채에 준하는 지자체 보증마저 무너지자 사기업 돈줄이 마른 것이다.

갈 곳을 잃은 돈이 몰리자 각 은행은 공격적으로 금리를 올리며 자금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5대 시중은행의 정기예금은 모두 4%대를 넘어섰다. 우리은행의 경우 최고금리가 5%에 육박한다. 여기에 은행채까지 대규모로 발행하며 돈을 쌓아두는 모양새다. 9월 한 달 동안 신규 발행된 은행채만 25조8800억원에 달한다.

은행권이 유동성을 급격히 빨아들이자 건설사에도 불똥이 튀고 있다. 지난 21일 국내 최대 재건축 단지인 둔촌주공아파트의 PF가 차환에 실패하며 현대건설 등 4곳의 건설사로 구성된 시공사업단이 7000억원 규모 사업비를 떠안게 됐다. 대형 건설사의 경우 자체 보유한 자금으로 이 같은 사태에 대처할 수 있지만 중·소규모 건설사의 경우 한 번의 PF 실패만으로도 도산할 위험이 적지 않다.

저축은행도 울상이다. 통상 저축은행은 제2금융권인 만큼 제1금융권인 시중은행보다 수신금리를 최소 1% 포인트 이상 높여야 안정적으로 자금 조달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은행권 예금금리가 5%에 육박하며 저축은행들은 울며겨자먹기로 수신금리를 6%대까지 올리는 상황이다. 한광열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레고랜드 이슈로 인해 ABCP 차환 리스크가 높아졌고 이에 따라 부실PF 편입비중이 큰 일부 금융기관에 대한 우려도 함께 커지고 있다”며 “앞으로도 채권투자에 대한 심리적 선호도가 크게 저하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