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3일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고 발표한 50조원 규모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의 핵심은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이 야기한 채권시장 ‘돈맥경화’ 해소다. 정부는 투자사들이 더 이상 채권을 사들이지 않는 상황인만큼 정책 자금으로 채권을 매입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키로 했다. 정부가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으면서 신용경색은 단기적으로 안정되겠지만 부실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투입하는 정책자금 50조원 중 가장 큰 규모는 신용등급 BBB+ 이상인 채권이 대상인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다. 정부는 당장 가동 가능한 1조6000억원을 활용해 오는 24일부터 시중에 나온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사들이기로 했다. 매입 대상에는 레고랜드 부도 사태를 부른 자산담보부기업어음(ABCP)도 포함된다. 채안펀드가 가동되는 것은 2008년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위기 이후 3번째다. 현재 가용한 재원이 적은 만큼 추가 펀드 자금 요청 작업도 병행한다.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을 통한 회사채·CP 추가 매입도 진행한다. 정부는 두 기관의 잔여 매입 여력(5조5000억원)을 10조원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신용보증기금이 발행하는 채권담보부증권(P-CBO) 발행액도 2조6000억원에서 5조6000억원으로 확대한다. 이렇게 되면 신용도가 낮은 중소·중견 기업도 회사채 발행이 가능하다. 현 시점에서 단기 자금 운용에 가장 취약한 부동한 PF에는 주택도시보증공사와 주택금융공사가 각각 5조원씩 10조원 규모 신용 보증 지원에 나선다.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부족한 증권사를 대상으로는 한국증권금융이 증권담보대출 등의 방식으로 3조원을 공급하기로 했다.
한국은행도 유동성 지원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은 대출 등의 적격담보 대상 증권에 국채 이외에 공공기관채, 은행채 등도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이날 회의 직후 “기존 원칙이나 방법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다 할 것”이라며 추가 대책을 시사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자금시장에 개입하면서 단기적으로는 안정을 찾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이즈가 상당히 크다. 경색 국면을 완화하는 데는 분명히 도움이 될 걸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시장 불안감을 줄여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우려도 적지 않다. 유동성 함정에 빠진 우량 기업의 ‘흑자 부도’를 막겠다는 취지인데 자칫하면 부실 기업까지 지원하게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황 연구위원은 “부실이 누적돼 있는 기업에 자금이 공급될 경우 정부가 투입한 유동성을 회수하지 못할 수 있다. 기업 부실 단계인 곳은 구조조정하는 식의 투트랙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전력과 은행이 채권을 쓸어가는 문제도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신준섭 권민지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