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주관하는 기념일은 일일이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번은 가까운 사람이 모범 납세자상을 받은 적이 있다. ‘납세자의 날’이 있다는 건 시상식 날 처음 알았다. 분명 축하받을 일인데, 수상자는 꽃다발까지 받을 게 아니라고 말했다. ‘안 내도 될 세금까지 다 납부해 상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겠다는 말도 했다.
납세자의 날처럼 기념 의식을 치르는 기념일은 줄잡아 50개가 넘는다. 명칭만으로는 왜 기념하는지 알 수 없는 날도 적지 않다. 9월 7일은 외교부와 환경부 주관 기념행사가 열리는 ‘푸른 하늘의 날’이다. 푸른 하늘의 날은 ‘푸른 하늘을 위한 국제 맑은 공기의 날(유엔 기념일)을 맞이해 대기질 개선에 대한 국민 이해와 관심을 높이고 대기오염 저감 활동의 범국가적 참여를 촉진하는’ 날이라고 한다. 기념일 지정 기준은 까다롭지 않다. 푸른 하늘의 날은 ‘국제적으로 인식을 같이해 기념하고 있는 날’이라는 지정 규정에 들어맞은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거나 호국정신의 뜻을 기리는 날’ ‘과학기술 경제발전 등 국가 주요 시책에 대한 기틀을 확립하는 데 의의가 큰 날’ 등이 기념일로 지정될 수 있다. ‘그밖에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기념일로서 지정할 가치가 있는 날’이라는 규정도 있으니 기념일 지정 여부는 사실상 정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불필요한 기념일을 없애자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숨은 공로자에게 상을 주고 격려하는 기념행사는 실로 뜻깊은 일이다. 예를 들어 열차 탈선이나 전복 사고 등의 예방 활동에 공을 세운 기관사에게 ‘철도의 날’ 표창을 주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불필요한 상을 주려고 억지로 만든 게 아닌가 싶은 기념일이 문제다. 현재 가장 가까운 정부 기념일은 10월 25일 ‘금융의 날’이다. 금융의 날에도 금융산업 발전에 공헌한 금융인이나 저축·기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기념행사가 열린다. 2016년 ‘저축의 날’에서 금융의 날로 이름이 바뀌면서 시상 분야도 세분됐다. 지난해 금융의 날에는 대통령 국무총리 금융위원장 표창 등의 상을 176명이 받았다.
문제는 수상자 명단이나 구체적 공적 사항이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거엔 금융 당국 관계자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 제기도 있었다. 금융의 날에는 특히 선심성 표창장을 남발해선 안 된다. 금융위원장 이상의 표창을 받은 사람들에게 제재 감면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 검사로 징계를 받게 됐을 때 감면권을 쓰면 제재 수위를 낮추거나 제재 면제까지 받을 수 있다. 속칭 확실한 ‘까임 방지권’ 한 장이 주어지는 셈이다.
지난해 대통령 표창 수상자 중에는 류영준 전 카카오페이 대표도 있었다. 류 전 대표는 간편결제 서비스인 카카오페이를 성장시킨 공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혁신금융 부문 수상에 빛났던 카카오페이 송금·결제 등의 서비스는 최근 카카오 데이터센터 화재 때 줄줄이 먹통 사태를 빚었다. 앞서 카카오 대표로 내정됐던 류 전 대표는 ‘주식 먹튀’ 논란에 휩싸이면서 지난 1월 사퇴했다. 자본시장법 위반 사건으로 금감원 검사를 받았던 사모펀드 운용사의 한 대표가 금융의 날에 받아 놓은 까임 방지권을 사용해 ‘주의’ 처분만 받고 넘어간 적도 있었다. 이 대표는 금융 당국의 한 간부와 유착 관계 아니냐는 의혹이 파다했다. 회삿돈 700억원가량을 횡령한 혐의로 재판 중인 우리은행 직원은 범죄를 저지르던 2015년 말 금융위원장 표창을 받았다.
다른 기념일 포상에는 문제가 없을까. 금융의 날을 시작으로 투명하고 공정한 포상이 이뤄지길 바란다.
김경택 경제부 차장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