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대형마트 앞을 지나다 보면 꽤나 인상적인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커다란 게임기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 서 있는 사람들의 인적 구성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유치원생들부터 제법 청소년에 가까운 아이들, 어른들이 모두 모여 있다. 보통 게임기 앞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이들의 행동도 흥미롭다. 사람들은 커다란 필통이나 플라스틱 통을 들고 있다. 캠핑용 의자를 들고와 앉아 대기줄에 합류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웬만해선 그 줄이 줄지 않는다. 차례가 오면 게임을 하고 집에 가는 게 아니라 다시 줄의 맨 뒤로 가 선다. 그들에겐 그게 규칙인 것 같았다.
사람들은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기다리지만 즐거워 보인다. 일행이 아닌 게 분명해 보이는데도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금세 친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눈다. 서로 플라스틱 통 안에 든 걸 보여주기도 하고 선뜻 자기 것을 내주기도 한다. 맨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임을 함께 관전하며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국가대표 축구 경기에 버금가는 열기다.
요즘 열풍이 풀고 있는 이 게임은 바로 ‘포켓몬 가오레’다. 자신이 가진 디스크를 게임기에 장착시킨 뒤 야생 포켓몬과 싸워 잡아들이는 방식이다. 우선 게임을 하려면 500원짜리 동전 세 개와 디스크 2장이 필요하다. 지난해 여름 국내 서비스를 시작한 이 게임은 오락실 문턱을 넘어 주요 대형마트와 백화점, 대형 서점까지 진출했다.
1996년 일본 닌텐도 게임으로 시작한 ‘포켓몬스터’는 1999년 국내에 소개됐다.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그룹 스마일게이트에 따르면 포켓몬스터 지식재산권(IP)이 지금까지 일으킨 매출은 1050억 달러(약 151조원)가량이다. 원작을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 중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얼마 전 지인의 일곱 살 난 아들이 ‘슬램덩크’ 애니메이션에 빠져 “놓고 온다”(주인공 강백호가 레이업슛을 연습하면서 하는 말)를 무한반복하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국내에서 1992년 주간 소년챔프에 연재를 시작한 스포츠만화이자 청춘만화의 전설인 ‘슬램덩크’는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올해 연말 극장판 개봉을 다시 한번 앞두고 있다.
오래된 기억은 수명이 길다.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익숙한 맛이나 냄새, 소리, 풍경 따위는 어린 시절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며칠 전에 들은 노래 가사는 가물가물해도 열 살 때 부르던 노래 가사는 정확히 생각난다. 엊그제 본 영화 대사는 헷갈리는데 20년 전에 본 영화 대사는 자다가도 읊을 수 있다. 그게 바로 IP의 힘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달 초 부산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아 콘텐츠&필름 마켓 콘퍼런스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일본 토에이 애니메이션 와시오 다카시 총괄 프로듀서를 만났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은 ‘드래곤볼’ ‘원피스’ ‘슬램덩크’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 ‘엉덩이 탐정’ 등을 만든 일본의 대표적 애니메이션 제작사다. 와시오 총괄 프로듀서는 “어린이 콘텐츠는 20~30년 뒤 그들이 어른이 됐을 때를 생각하며 만들어야 한다. 그때 수확할 게 없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대표적 국내 애니메이션 IP ‘신비아파트’를 만든 석종서 스튜디오 바주카 국장도 과거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성인들이 재밌게 볼 수 있는 버전의 ‘신비아파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을 생각 중”이라며 ‘롱타임 밸류’를 언급했다. 2014년 ‘신비아파트’ 첫 방송 당시 초등학교에 입학한 팬들은 머지않아 대학생이 된다.
대한민국 40대 이하 성인이라면 함께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IP들이 추억으로 남지 않고 자식 세대에 또 다른 모습으로 찾아와 재미와 감동을 주고 있다. 지금 콘텐츠를 만들고 있거나 앞으로 만들 사람이라면 생각해 볼 만한 사례들이다. 장수하는 IP를 만들고 끊임없이 변주하는 일은 애니메이션 장르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임세정 문화체육부 차장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