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나는 1922 위원회 위원장인 그레이엄 브래디 경과 만났습니다. 우리는 다음 주 지도부 선거를 치르기로 동의했습니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20일(현지시간) 사임 기자회견에서 밝힌 발언 중 일부다. 영국 최단 재임 총리라는 불명예 기록이 쓰여진 순간이다. 앞서 보리스 존슨, 테레사 메이 전 총리들도 사임 발표는 1922 위원회 위원장을 만난 뒤에 나왔다. 존슨과 메이 전 총리는 사퇴 의사가 없었음에도 1922 위원회의 불신임 투표 가능성 언질을 들은 뒤 뜻을 접었다. 위기에 처한 영국 총리에게 1922 위원회 위원장의 호출은 사퇴 통보와 같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1922 위원회는 영국 보수당의 평의원 모임을 말한다. BBC에 따르면 1922년 자유당과 연립내각을 꾸리던 보수당 평의원들이 자유당 소속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의 국정운영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런던의 칼튼 클럽에 모여 연정을 해체하기로 했고 조지 총리 퇴진을 이끌어냈다. 이듬해 총선에서 보수당이 단독 집권에 성공한 뒤 당권 시스템을 제도화해 평의원 위주의 위원회를 만들었다. 명칭은 1922 위원회이지만 창립 연도는 1923년이었다.
보수당 평의원들은 ‘뒷자리 의원(backbencher)’으로 불린다. 영국 의사당에서는 다선 의원과 각료, 당 지도부가 앞줄(frontbencher)에, 신참들이 뒷줄에 앉는 전통 때문이다. 내각의 운영과 정책 결정은 프런트벤처들이 주도하는 반면, 백벤처들은 정책을 건의하고 당 대표인 총리를 선출하거나 쫓아내는 막강한 역할을 맡는다. 민심의 동향을 신참들이 더 잘 안다는 이유에서다. 의원내각제 하의 영국에서 1922 위원회는 일종의 ‘여당 내 야당’식 견제기구다. 자신들이 환영했던 트러스 총리가 무모한 감세안으로 민심 이반을 야기하자 지체없이 취임 44일 만에 레드카드를 꺼내면서 존재 의의를 보여줬다. 패거리 정치로 인해 대통령실, 여당, 야당 내에서 이견 하나 내기 힘든 한국 상황에서 보면 신선하고 충격적일 따름이다.
고세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