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은마아파트

입력 2022-10-21 04:11

서울 아파트의 역사는 1930년 시작한다. 일본 미쿠니상사가 지금의 남산 3호 터널 근처에 3층짜리 직원용 아파트를 지었다. 5층 높이 화신백화점이 등장하기 전이니 고층건물 축에 들었다. 여러 가구가 같은 건물에 사는 것도 입방아에 올랐다. 7년 뒤 광화문에서 마포로 가는 길에 도요타아파트가 들어섰다. 지난 6월 철거가 확정된 충정아파트가 그것이다. 1942년 준공된 혜화아파트까지 아파트는 지어질 때마다 화제를 불러온 서울의 명소였다.

서울이 아파트의 도시가 된 건 경제 개발이 본격화된 1970년대부터다. 무작정 상경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서울 사람들에게 집을 제공해야 했다. 좁은데 많이 살아야하니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와우아파트 붕괴로 중단됐지만 시내 곳곳에 서민을 위한 시민아파트가 건설됐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을 한강 너머로 넓히겠다는 강남개발계획을 발표한 뒤 아파트는 서민을 위한 도심의 실용적 주거라는 생각이 바뀌었다. 연탄을 갈지 않는 중앙난방, 욕조가 있는 화장실, 가스불로 밥을 하는 입식 부엌은 생활의 혁명이었다. 돈 있는 사람을 위한 대형 아파트가 속속 등장했다. ‘강남 스타일’이 시작된 것이다. 그 중심에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와 대치동 은마아파트가 있었다.

은마아파트는 강남에서 가장 큰 아파트 단지였다. 1975년 착공부터 1987년 14차 분양까지 꾸준히 규모를 키운 현대아파트와 달리 1976년부터 4000가구 넘는 대단지로 출발했다. 교통이 불편한 미나리밭에 아파트를 세운 신흥 한보건설을 재계의 총아로 띄웠다. 정태수 회장이 구속되고 그룹은 해체됐지만 은마아파트는 강남 8학군과 대치동 학원가를 업고 전설로 등극했다. 하지만 1996년부터 추진된 재건축이 번번이 좌절돼 비싼 값 못하는 아파트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그러던 은마아파트가 19일 서울시 재건축 심의를 통과했다. 공공보행로와 공원 등 공공 기여를 크게 늘린 게 주효했다고 한다. 은마아파트가 서울의 주거문화를 또다시 바꾸게 될지 궁금하다.

고승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