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세 콘서트를 다녀왔다. 10월의 토요일 저녁,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넓디넓은 잔디마당에서 열렸다. 코로나 이후 이런 대단위 공연장에 온 건 처음이니 대체 얼마 만인가. 만명 정도의 관객이 야외 좌석을 가득 채웠다. 돗자리를 펴놓고 맥주를 마시며 관람하는 이도 많았다. 지겨운 마스크를 벗고 같이 간 친구들과 목청껏 ‘떼창’을 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아서 울컥했다. 거기 모인 사람들 심정이 다 같았으리라. 특히나 내 또래라면 더 감회가 깊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 지나가면’이라는 애틋한 노래가 발표된 시기는 1987년이다. 라디오에서도 커피숍에서도 툭하면 흘러나올 만큼 히트를 쳤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과외로 번 돈을 털어 LP 음반을 샀다. 집에 돌아오면 밤새 틀어놓고 나 홀로 흥얼거렸다. 집이 아닌 곳에서는 부르기 쉽지 않았으니까. 코로나 시국처럼 밖에서는 못 부르게 법으로 막았냐고? 그럴 리가 있나. 노래방 같은 게 없던 당시엔 친구들과 술을 먹다가도 툭하면 즉석에서 노래를 불러대곤 했다.
주로 노동과 민중을 앞세운 ‘운동가요’들이었다. 학생들이 데모를 하다 죽어 나가는, 정치적으로 엄혹했던 시절이다. 대중가요 노래 가사처럼 달콤한 사랑놀음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누군가 부르지 말라고 입을 틀어막진 않았지만 어느 자리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한창 사랑의 열병을 앓기 쉬운 20대 청춘들에겐 가혹한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친 듯 사랑하고 심장이 찢기는 듯 이별하는 건 젊음의 특권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차마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자꾸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겼다. 어떻게 내 맘을 은근히 전할 수 있을지 전전긍긍했다. 여럿이 술자리를 가졌고, 그날도 의례처럼 한 사람씩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다 싶었다. ‘에라, 모르겠다!’ 평소 혼자만 흥얼거리던 이문세의 ‘그대와 영원히’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그때만 해도 대중에게 잘 알려진 노래가 아니었다. “저 붉은 바다 해 끝까지 그대와 함께 가리/ 이 세상이 변한다 해도 나의 사랑 그대와 영원히.”
누가 들어도 절절한 사랑 고백이었다. 과연 효과가 있었냐고? 당연히 있었다. 술자리가 끝나자 내게 다가오더니, 가사가 좋다며 노래를 가르쳐 달라는 게 아닌가. 엥? 그 사람은 ‘그대’를 당연히 ‘민중’이라든지 ‘투사’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꿋꿋이 어깨동무를 하고 가시밭길을 걷겠다는 뜨거운 맹세로 들렸던 거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다. 맘대로 사랑한다 표현 못하고, 멋대로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지 못했으니. 그게 과연 사는 건가.
이문세 노래는 내게 일종의 ‘마들렌’이다. 그 혼란스럽고 자유롭지 못한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원인과 양상은 전혀 달랐지만 코로나로 인해 우리 모두가 겪은 지난 3년간의 세월도 고통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맨얼굴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좋아하는 노래를 실컷 부르고 나니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약간이나마 보상받은 느낌이랄까. 누구보다 청춘들에게 코로나 시국은 뜨거운 사랑을 가로막은 장벽이었을 것이다. 나처럼 중년에 뒤늦게 노래나 부르며 아쉬워 말고, 이제부터라도 젊음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기 바란다.
그나저나 이문세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저토록 무대 위에서 열정을 내뿜는가. 하기야 만명 넘는 팬들이 일제히 야광봉을 휘두르며 호명하고 노래를 따라 부르면 나라도 그럴 것 같다. 강의를 들으러 오는 독자가 50명만 모여도 입이 벌어지는 작가 입장에서 살짝 서글프기도 했다. 종이값은 자꾸 오르고 덩달아 책값도 올릴 수밖에 없단다. 책값의 열 배 가까운 돈을 지불하며 콘서트를 찾는 사람은 점점 늘어날 전망이지만 그나마 책 사는 사람은 더욱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에잇! 다음 생에서는 나도 가수로 살아보련다. 노래라도 실컷 부르게.
마녀체력(‘걷기의 말들’ 작가·생활체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