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언어·마음… 어떻게 탄생했을까

입력 2022-10-20 19:09
돌로 이뤄진 이 원들을 보면 자연적으로 이런 형태를 이루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상은 북극해 주변의 섬인 스피츠베르겐에서 동결과 융해가 반복되며 만들어진 자연의 산물이다. 이 원들이 만들어진 데는 이유가 없으며, 그 뒤에 누군가 설계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전개된 누적적이고 복합적인 변화가 만들어낸 우연일 뿐이다. 이 원형 돌무더기들은 마음이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이해하는데 좋은 비유가 된다. 바다출판사 제공

한 권에 4만8000원이고 분량은 거의 700쪽에 달한다. 게다가 과학책이다. ‘마음은 어떻게 출현했을까’를 다룬 책이라고. 일반적인 독자라면 이 정도에서 눈길을 돌리고 말 수 있다. 그런데 저자가 대니얼 데닛이다. ‘지구 최강의 지식인’, ‘지구 최고의 지식 요리사’, 그리고 인공지능과 로봇 연구의 개척자인 마빈 민스키 MIT 교수가 “지구를 대표해 외계인과 맞설 단 한 사람”이라고 말한 그 데닛이다.

미국 터포츠대 철학교수인 데닛은 신경과학, 언어학, 인공지능, 컴퓨터학, 심리학 등의 최신 성과를 바탕으로 의식, 진화, 의미, 자유의지, 인공지능, 종교 등을 바라보는 과학적 관점을 제시해왔다. 무엇보다 그는 이런 빅퀘스천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쓰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왔다.

데닛이라는 이름에 기대면 겨우 책을 펼쳐볼 용기가 난다. 이 책은 데닛이 2018년 미국에서 출간한 최근작이자 50여년에 걸친 마음 연구를 결집해놓은 역작이다.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책은 이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간다. 아직까지 누구도 완벽하게 답변해주지 않은, 그야말로 거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언어는 어떻게 탄생했는가에 먼저 답해야 한다. 이 역시 엄청난 질문들이다.


데닛은 박테리아의 단순한 움직임만 있던 세상에서 인간이 태어나고 언어와 마음이 출현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세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 대한 설명은 아주 복잡하지만 데닛은 영리한 사고실험과 쉬운 비유, 적절한 질문들로 날렵하게 돌파해 나간다. 데닛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 모든 놀라운 것들의 생성은 다윈이 말한 알고리즘으로서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에 따른 것, 또는 그에게 파생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다윈주의적 진화란 장기간에 걸쳐 수없이 나타나는 변이 중 최적화를 특징으로 하는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니까 물질의 세계에서 인간이 태어난 것도,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언어를 갖게 된 것도, 그리고 마음을 가진 유일한 생명체가 된 것도 진화의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과 육체가 따로 존재한다는 이원론이나 생명체가 어떤 초월적 존재의 설계라는 주장을 거부한다.

데닛에 따르면 인간, 언어, 마음의 탄생에서 설계자는 없다. 그 진화 과정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그저 아주 희귀한 우연과 그 우연을 포착한 자연선택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언어와 마음이 출현한 이후 인간의 진화는 근본적으로 다른 국면에 접어든다. “문화적으로 진화해온 정보 구조라는 공생자가 우리에게 침입한 덕분에, 우리 뇌는 인공물들과 우리 자신의 삶을 지성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자연선택으로 만들어진 언어와 마음의 힘으로 인간은 지적 설계자가 되었다. 특히 언어가 정착되고 나서 인간의 진화는 질적으로 달라졌다. 생물학적 진화 외에 문화적 진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다윈주의적 진화는 하의상달식으로 전개되는데, 문화적 진화는 상의하달식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빠르다.

“언어 능력의 성장은 문화적 진화를 가속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 문화적 진화의 과정 자체를 덜 다윈주의적이고 덜 하의상달적인 무언가로 진화하도록 허용했다… 덜 다윈주의적이며 덜 하의상달적인 것으로의 진화는 생명의 나무에서 가장 최근에 맺힌 열매라 할 수 있는 상의하달식 이해로 가는 길을, 그리고 지성적 설계의 시대가 도래할 길을 닦아주었다.”

문화적 진화라는 개념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문화적 진화는 호모 사피엔스가 유인원 수준에서 어떻게 이렇게 멀리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인간의 지성적 설계는 컴퓨터를 만들었고 인공지능을 낳았다. 이제 지성적 설계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이 설계하는 진화의 역사가 펼쳐질 것인가. 데닛은 “나는 최근 그토록 강한 경고성 주의를 끌고 있는 ‘초인적인 지능’ 같은 그 어떤 것도-앞으로 반세기 안에는-딥러닝이 가져다주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공지능은 “거인들의 어깨에 서서 지성적 설계의 앞선 산물들이 드러내 보이는 모든 영리함을 마음껏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의 유형에 대해서는 눈먼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계속 의존할 수밖에 없다.

2015년 국내 출간된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를 통해 데닛을 아는 독자라면 이번 새 책이 반가울 수 있다. 출판사 측은 과학·철학계의 수퍼스타인 데닛을 국내 독자들에게 제대로 소개하기 위해 번역에 5년의 시간을 들였다. 번역자로는 10년간 데닛을 공부한 연구자 신광복을 섭외했다.

이 책을 읽어내는 것은 꽤 힘든 지적 도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의 탄생을 다룬 가장 쉬운 책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