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어그로 전성시대

입력 2022-10-20 04:08

나에겐 남몰래 즐기는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다.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이하 데바데)라는 온라인 게임의 플레이 영상을 유튜브로 보는 것이다. 중년 아재의 남우세스러운 취미이긴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순 없다. 어찌나 스릴 넘치는지 영상을 보는 순간만큼은 날 짓누르던 상념이 싹 사라지기 때문이다.

데바데는 2016년 비헤이비어라는 게임사가 출시한 비대칭 서바이벌 게임이다. 공포물답게 맵 공간은 기괴하고 음산하며, 괴물이 쫓아올 때 흐르는 효과음은 심장을 쥐어짜는 듯 긴장감 넘친다. 게임 곳곳에 다소 과격한 요소가 있어 청소년은 이용할 수 없는데 기본 뼈대는 술래잡기다. 서로 다른 곳에서 접속한 4명의 생존자는 괴물을 피해 맵에 산재한 7개의 발전기 중 5개를 돌려야 한다. 그럼 마지막 탈출을 위한 출구를 열 기회를 얻게 된다. 괴물은 여러 캐릭터가 있는데 생존자보다 빠르고 저마다 강력한 무기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생존자들은 발전기를 돌리기 위해 눈치껏 협력하는 것은 물론 각종 아이템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괴물의 손아귀에 처참하게 희생된다.

초보 생존자는 캐비닛이나 풀숲 등에 숨어 목숨을 연명하지만, 고수는 다르다. 창틀을 재빠르게 넘거나 판자를 내리는 등 지형지물을 활용해 괴물을 따돌린다. 1만 시간 이상 데바데를 섭렵한 초고수의 경우 다른 생존자들이 발전기를 돌릴 수 있도록 아예 괴물을 꾀어내기도 하는데 이런 행동을 ‘어그로’라고 부른다. 도발하거나 약 올린다는 뜻의 영어 단어 ‘aggravation’에서 유래한 말이다. 어찌 됐든 데바데의 어그로는 그야말로 남을 살리기 위해 날 희생하고, 나아가 보는 이들의 스트레스까지 뻥 하고 날려주는 즐거움을 선사하니 ‘착한 어그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에선 착한 어그로보다는 ‘나쁜 어그로’가 판을 친다. 가히 어그로 전성시대다. 슬기로운 인터넷 생활의 장애물이자 골칫거리가 된 지 오래다. 예를 들어 ‘서울이 아니면 다 시골이죠’라는 글을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쓰고는 네티즌들의 분노에 찬 댓글에 무대응하는 경우가 그렇다. 익명의 바다에 숨어 회원 간 키보드 전쟁을 유도하거나 심지어 자신에게 악성 댓글을 남긴 회원들을 고소하는 사례도 있다. 오죽하면 어그로 차단 프로그램까지 나왔을까. 유튜브에선 더 가관이다.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을 타깃 삼아 루머를 퍼뜨리는 등 공격을 일삼는다. ‘별풍선’ 같은 후원금을 노리고 직접 당사자를 찾아가 소란을 피우거나 경찰에 연행되는 순간을 생중계하는 어그로꾼들이 있으니, 기가 찰 일이다.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이 지난 12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 도중 문재인 전 대통령을 향해 “김일성주의자”라고 발언해 파문이 일고 있다. 김 위원장은 “신영복 선생을 존경한다는 사람은 김일성주의자”라면서 “문 전 대통령이 신영복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사상가라고 한다면 확실하게 김일성주의자”라고 말했다. 문 전 대통령을 총살감이라고 한 발언에 대해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가라는 진성준 의원의 질문에 대해선 국감에서는 “지금은 과했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가 다음 날 한 라디오 방송에선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 주위를 뜨악하게 했다. 결국 국회 모욕 혐의로 김 위원장을 고발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여야가 날을 세우기도 했으니 결과적으로 어그로를 끈 셈이다.

남을 살리려고 날 희생했다면 착한 어그로이고 별풍선이나 관심을 얻으려고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켰다면 나쁜 어그로일 텐데, 치열한 삶을 살았던 노동운동가이자 학생운동의 전설로 불렸던 정계 원로의 이번 발언을 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할 따름이다.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