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계올림픽을 취재했던 지난해 8월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일이다. 미디어 셔틀버스가 올림픽 주경기장인 도쿄 신주쿠 국립경기장을 경유하기 위해 진입로로 들어서면서 신호 대기를 받고 정차하자 팻말과 현수막을 든 시위대가 그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출장 내내 목격하고 기사로 다뤄온 ‘올림픽 보이콧’ 시위. 하지만 그날 시위대 무리에서 평소와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중년 남성 2명이 시위대 무리 속 팻말을 든 남성 1명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따져 물었다. 팻말 든 남성은 그저 미디어 버스만을 바라보며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조금 이상한 건 나머지 시위대의 행동이었다. 미디어 셔틀버스 앞에서 해외 기자들에게 잘 보이도록 팻말과 현수막을 흔들며 ‘올림픽을 취소하라’는 구호를 외칠 뿐 중년들을 막아서지 않았다. 결국 상황을 정리한 건 주변을 지키던 경찰관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중년들의 표적이 된 남성은 올림픽 보이콧 시위에 참가한 게 아니었다. 그의 팻말에 영어와 한자로 적힌 문구는 달랐다. ‘천황제 폐지’. 그의 구호는 왕정 반대였다.
경기를 마치고 도쿄 오다이바 메인프레스센터로 이동해 하루 일과를 정리한 뒤에도 시위대 속에서 왕정 반대를 외친 남성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메인프레스센터에서 우연하게 말문을 튼 일본인 기자에게 왕정 반대 시위를 한 남성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고 의견을 물으니 “그가 많은 용기를 냈을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본에서 누구든 왕정 반대를 말할 수 있지만 공개적으로 의견을 내면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만화·영화·방송에서 눈살 찌푸려지는 수위의 장면을 숱하게 그려내는 일본에서 금기시되는 것이 있다. 일본에서 왕은 비판의 대상이나 패러디 소재로 삼는 게 용납되지 않는다. 일본은 이 묵시를 ‘국화금기’라는 말로 설명한다. 국화는 일본에서 왕실을 상징하는 꽃이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할 때까지 왕은 인간과 다른 존재로 여겨졌다. 당시 왕을 비판한 언론은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처벌됐다. 불경죄는 패전한 뒤 사라졌지만 입헌군주국으로 왕권을 축소한 현대의 일본에서도 국화금기를 두려워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남아 있다.
국화금기와 관련해 일본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건이 있다. 작가 후카자와 시치로는 1960년 월간지 주오코론 12월호에 실은 소설에서 백성이 왕태자비를 살해하고 왕궁을 습격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이에 격분한 청년이 1961년 2월 주오코론 사장 집에 침입해 가정부 1명을 살해하고 사장 아내에게 중상을 입혔다. 사상자를 낸 습격을 당하고도 주오코론은 사과문을 게재했다.
일본의 고도성장으로 사회적 수준을 높인 1980년대에도 왕을 부정적으로 다룬 출판물이나 영화는 극우의 표적이 됐다. 일본 배급사 도에이는 1980년 영화 ‘도쿠가와 일족의 붕괴’에서 1846~1867년 재위한 고메이 왕의 암살 장면을 묘사했다. 극우단체는 도에이 사무실로 몰려가 항의했다. 결국 영화를 제작한 프로듀서가 교토 헤이안궁에 참배해 극우단체의 항의를 잠재웠다.
21세기로 넘어와서는 사이버불링이 새로운 공격 방법으로 등장했다. 익명의 블로그에서 여론을 선동해 무수한 공격을 가하는 사이버불링은 국화금기에 도전하는 의지를 꺾는 데 효과적이었다. 2006년 11월 주간지 슈칸긴요비는 왕실을 비판적으로 다룬 연극을 제작해 일본 블로거들의 십자포화를 받았다. 슈칸긴요비도 결국 대중에게 고개를 숙였다.
국화금기를 지탱해온 건 언제나 극우였다. 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지난 세기 전쟁범죄를 옹호하고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세력들. 2019년 5월 즉위한 나루히토 국왕은 상왕 아키히토를 따라 패전일(8월 15일) 추도식마다 ‘깊은 반성’을 언급하지만,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전범을 합사한 신사에 참배하며 전쟁 가능한 국가를 만들자고 주장하는 그 세력들. 그들을 표밭으로 삼은 정당과 그 정당의 집권을 허용한 국민들. 금기에 스스로를 가둔 21세기 일본의 현재다.
‘분위기를 깨지 말라. 부당하다고 느낄지언정 저항하지 말라. 바꿀 수 없으니 말조차 꺼내지 말라.’ 국화금기란 그런 것이다. 부당함을 비판하기 위한 말과 행동에 용기를 내야 할 만큼 금기를 쌓아가는 사회가 어디 일본뿐일까.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어 보인다.
김철오 온라인뉴스부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