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 노동관계 수업을 마치며 수강생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강의 내용 하나를 꼽아 보라고 했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답게 대부분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정부의 청년 고용지원 프로그램이나 직장생활에 필요한 노동법상 근로자 권리에 대해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듯 열심히 설명했다. 의아했던 점은 꽤나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술된 근로기준법이나 남녀고용평등법상의 모성보호와 성차별금지, 여성고용촉진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말고사 때 한 학생의 쪽지 고백에 따르면 남학생들 눈치가 보이고 공연히 ‘페미니스트’로 보일까 두려워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2030 청년들 사이에서 젠더 이슈는 오래전부터 분위기만 망치는 기피 주제였다. 지난 대선 때 젠더 갈등 프레임은 더욱 구조화됐고 공론의 장에서조차 합리적 토론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성평등 교육에 관한 정부 공청회 하나 제대로 열 수 없는 사회가 됐다.
그나마 공론의 공백을 메웠던 것이 가끔 있었던 외국 여성 리더들의 이벤트가 아니었나 싶다. 최근 방한했던 미국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윤여정과 김연아, 최수연 등 ‘신기원을 이룩한 여성들’과의 대화에서 사회적 차별과 불이익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는 자세를 강조한 경우나 지난달 미국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한국은행을 방문했을 때 여성 직원들과 따로 만나 전문직 여성으로 성공한 경험을 들려준 게 그런 사례들이다. 여러 경력을 쌓으며 첫 여성 타이틀을 달고 다녔던 옐런 장관은 남편의 적극적 아이 돌봄과 격려가 없었다면 공직을 이어가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의 남편은 잘 알려진 대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 애컬로프다. 국내 정치인들이 젠더 갈라치기에 열을 올릴 때 외국 공직자들이 한국의 여성 리더를 만나 성평등과 일가정 균형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현실은 어색하고 서글픈 일이다.
가까운 장래에 사정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정부가 여성가족부 폐지안을 들고나오자 야당과 진보 진영은 결집하기 시작했고 대선 이후 잠잠하던 젠더 갈등은 다시 첨예한 정치 갈등으로 비화할 조짐이다. 여가부 존폐 또는 ‘성평등’이냐 ‘양성평등’이냐로 갈라져 한바탕 소란을 벌이겠지만 5년 후 윤석열정부가 받아들 성적표는 결국 성장률과 고용률 그리고 정부가 매년 발표하는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관한 40여개 지표들이다. 여가부 출범 20주년을 맞아 9월 초 정부가 발표한 관련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여성의 고용률과 사회적 지위가 개선되고 성별 격차도 완화되는 추세지만 국제 비교를 해보면 여전히 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이는 단순히 국격이나 여성 인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과 분배 개선에 필요한 절박한 경제적 이슈이기도 하다.
국내외 연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잠재성장률을 높이고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여성 경제활동을 촉진해야 하고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여성의 경력단절과 노동시장의 성별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달 말 국제통화기금(IMF) 기타 고피나트 수석부총재는 여가부 주최 포럼에서 한국이 2035년까지 여성 고용률을 남성과 같은 수준으로 올리면 성장률을 7% 더 높일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발제문 제목은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경제 안정을 도모하는 양성평등’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2 한국경제 보고서’는 한국의 초산 연령이 1993년 26.2세에서 2020년 32.3세로 급격히 높아져 미국 영국 일본 등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2~5년 정도 늦다며 여성의 불안정 고용구조를 문제 삼았다. 최근 국내 연구자들의 실증 연구에 따르면 청년 취업난과 비정규직 증가 등 고용 지위 악화가 결혼과 출산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사와 공무원 또는 세종시의 출산율이 유의미하게 높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직장에 따라 임신이 축복 또는 민폐, 아니면 경력단절이 되기도 하는 현실에서 정부가 자랑하는 육아휴직 1년6개월 정책은 공허할 뿐이다. 새 정부는 전임 정부와 달리 장관을 비롯한 고위직의 여성 비율에 연연하지 않을 태세다.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고용이 불안정하고 근로조건이 열악한 저임금 여성 취업자 지원을 대표적인 여성 정책으로 끌어올리면 어떨까. 이는 분명 5년 후 받아들 성적표에도 도움이 되고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혁에도 부합하는 방향이다.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