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식된 보일러·텅 빈 옷장… 수해 주민들 겨울 채비 시름

입력 2022-10-22 04:04 수정 2022-10-22 04:04
지난 8월 기록적인 폭우 때 침수 피해를 입은 이들 상당수가 당시의 상처에서 회복되기도 전에 성큼 다가온 겨울을 날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다.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한 주택의 보일러 위에 비를 가리는 용도의 단열재가 덮여 있다.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 사는 조모(81)씨는 지난 18일 저녁 때 이른 추위에 연탄보일러를 재가동했다.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지난여름 잔뜩 물을 먹은 보일러는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조씨와 이웃들은 안에서 새어 나오는 녹물을 연거푸 휴지로 닦아내고 번개탄을 연달아 바꿔 넣으며 씨름했다. 수십분이 지나서야 어렵사리 연탄에 불이 붙고 방안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보일러 펌프까지 고장나는 상황은 피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생활하는 그에게 수리비는 큰 부담이다. 조씨는 기초노령연금에 노인 일자리 급여인 27만원을 보태 한 달을 나고 있다. 이곳 주민들에게는 지난 8월 수해 때 200만원씩 재난지원금이 지급됐지만, 망가진 지붕에 새 천막을 씌우는 데만 100만원 넘게 들었다.

지난 8일 조씨는 한 봉사 단체에서 연탄 150장을 지원받았다. 한 달 정도를 버틸 수 있는 분량이다. 지난겨울 아껴가며 연탄을 모아뒀지만, 비에 폭 젖는 바람에 전부 내다 버려야 했다.

이날 찾은 구룡마을에서는 아침부터 살구색 연탄재를 나르는 주민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수해가 만든 쓰레기 더미 옆에 두세 덩이씩 연탄재를 쌓아 둔 집들도 많았다. 폭우 피해가 가시기도 전에 때 이른 추위가 찾아오면서 주민들이 잇따라 연탄보일러를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에선 600여 가구 중 3분의 2가 연탄보일러에 의지해 겨울을 난다. 기름이나 전기보일러를 쓰는 가구들도 있다. 주민들은 여기에 검은색 단열재로 지붕과 벽을 몇 겹씩 싸서 온기를 보탠다. 천막이나 현수막을 지붕 위에 층층이 쌓는 집들도 보였다. 이곳 집들은 구청에서 주택이 아닌 ‘간이 공작물’로 분류했을 만큼 낡고 허술해서 단열재 없이는 난방을 가동해도 냉기가 전부 가시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수해가 할퀴고 지나간 집들도 단열재만큼은 지체 없이 복구를 마친 모습이었다. 하지만 보일러 쪽은 상황이 달랐다. 마을에는 이날까지도 수해 때 고장난 보일러를 수리하지 못한 집들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인근에는 지난 수해 때 파손된 연탄보일러를 직접 수리해서 쓰고 있는 집도 있다.

피해가 심했던 3지구에 위치한 김명신(69)씨의 집은 2구짜리 연탄보일러가 한쪽밖에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30만원에 이르는 보일러 수리 비용을 아끼기 위해 혼자 보일러를 고쳐봤지만, 상태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김씨는 “안 되면 이대로 겨울을 나는 것도 각오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4평 남짓의 단칸방에서 홀로 지내는 홍모(81)씨는 이달 초 전기장판을 새로 장만했다. 홍씨의 방에도 연탄보일러가 설치돼 있기는 하지만 ‘그림의 떡’이다. 구룡마을에서도 특히 좁은 홍씨의 방은 연탄을 때면 연기가 삽시간에 자욱해진다. 그는 “연탄을 땔 수 있는 집들은 그래도 넓어서 사정이 나은 경우”라고 하소연했다.

4지구에 사는 60대 남성 김모씨는 지난 폭우 때 기름보일러가 고장이 났지만 당분간 고칠 생각이 없다. 연탄 외에는 난방비가 지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김씨는 “기름이 비싸서 원래도 정말 추운 날만 가끔 트는 게 고작이었다”라며 “전기장판만 갖고 최대한 버텨보려 한다”고 얘기했다.

밤사이 땠던 연탄재를 버리러 가는 주민의 모습.

수해 당시 피해가 컸던 서울 동작구 성대전통시장 인근의 반지하 주택 주민들 역시 뚝 떨어진 기온에 서둘러 겨울나기 준비에 들어갔다. 이곳도 구룡마을과 마찬가지로 지난여름 수해 때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됐다.

기초생활수급자 김정삼(52)씨는 냉기가 도는 반지하 방 안에서 얇은 가을옷 한 벌만을 입고 있었다. 지난 수해 때 변기에서 오물 섞인 물이 역류해 옷들이 전부 젖어버렸기 때문이다. 지급받은 재난지원금은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을 다시 구하는 데 대부분 썼다. 김씨는 “‘똥물’에 젖다 보니 도저히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겨울옷을 다 내다 버렸다”며 “방향제도 잔뜩 사다 뒀지만 아직도 방에서 악취가 난다”고 말했다. 이날도 악취 때문에 쌀쌀한 바람이 부는 날씨에도 계속 창문을 열어둔 채 하루를 보냈다.


침수된 셋방을 떠나지 못하고 텐트를 친 채 지냈던 이의범(59)씨는 며칠 전 시장에서 급하게 패딩 세 장을 구입했다. 두툼한 옷 세 벌이 더해졌는데도 새로 설치한 행거형 옷걸이는 절반밖에 차지 않았다. 그 역시 이번 수해로 대부분 옷을 버렸기 때문이다. 건져낸 옷들을 어떻게든 빨아서 입어 보려고 했지만, 몇 번을 빨아도 냄새가 없어지지 않아 결국 전부 내놓았다. 얼마 전 겨울용 이불도 새로 구입했다는 이씨는 “겨울 살림 때문에 당분간 돈 나갈 곳도 많은데 걱정”이라고 말했다.

3년간 인근 반지하에서 살아온 이모(45)씨는 반절밖에 남지 않은 두 자녀의 겨울옷이 걱정이다. 이씨 역시 이번 수해로 재난지원금 150만원을 받았지만 물에 잠긴 세간을 복구하기에도 모자란 수준이었다. 이씨는 “재난을 당해도 정부 지원만으로는 손해를 메꾸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목숨이 위태로웠던 지난 여름보다는 겨울이 차라리 낫다며 위안을 삼았다. 지난 8월 폭우 때 창틀을 뜯어낸 집주인의 손에 간신히 구조됐던 이씨는 이날 이른 저녁부터 얼마 전 수리한 가스보일러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그는 “겨울에는 그래도 목숨까지 위험하지는 않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글·사진=이의재 기자 sentinel@kmib.co.kr